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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30 크리스천이 못하는 메시아론 변증 - 다윗의 후손
- 2013.05.01 요한계시록이 예수의 계시가 아닌 이유와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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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24 개신교의 성경 외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 2013.04.24 개신교의 성경 내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 2013.04.17 조선의 개신교 초기 상황을 알 수 있는 글
- 2013.04.17 고대필사오류1, 예수에 의하면 형제는 몇번 용서해야하는가?
- 2013.04.11 개신교 성경의 역사 - 공동번역성서(개신교의 유일한 노력)
- 2013.04.11 개신교 성경의 역사 - 새번역 이야기
글
조병수 교수의 'Q문서 평가'를 반박함
조병수 교수가 직접 쓴 'Q문서 평가'를 반박함.
'->'와 '굵은 글씨'는 전투적무신론의 글 및 강조이며, 작은 글씨(8pt)는 조병수 교수의 글이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직접 올린 글로 교수의 프로필 부터 시작한다.
조병수 목사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Westfaelische Wilhelms-Universitaet) 신학부 신학박사 (Dr. theol.) 신약학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1988-1990)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1991-1994)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직접 확인해본 결과 현재 예장합신 신학대학원의 신약학 교수이고, 현재 예장합신 신대원 총장이다.
Q문서 평가 (2008.7.6. 합동소식)
최근에 소위 Q문서를 기초로 하여 기독교를 다시 정의하자는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 이때 Q문서의 허와 실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Q란 무엇인가? Q는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Quelle)의 약자이다. Q의 내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공통적으로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는 들어있지 않는 본문들이다. 예를 들면, 겨자씨 같은 믿음에 관한 말씀이다(마 17:20/눅 17:5f.). 복음서들을 언급할 때 사선 / 또는 이중사선 //은 병행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로 이루어진 어록 수집이라고 한다. Q란 표현은 지난 19세기에 공관복음서 연구에서 두 자료 설이 주장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관복음서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종합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서 같은 조망을 가지고 기록된 복음서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두 자료 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과 또 어떤 자료(소위 Q)를 사용해서 기록했다고 추정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마가복음과 어떤 자료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자에게만 독특한 내용들이 있다. 따라서 두 자료 설은 필연적으로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 우선설에 근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의존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자료(소위 Q)를 가정하는 Q자료 설에 근거한다.
Q자료 설은 20세기 초엽부터 양식사라고 불리는 성경연구방식이 활개를 치면서 공관복음서연구 분야를 삽시간에 장악했다. 물론 이에 대하여 거센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신약학자들이 Q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Q자료라고 부르던 것이 Q전승 또는 Q문서라는 표현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아예 Q복음이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고, Q공동체라든가 Q신학이라는 용어들도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국제적인 Q 프로젝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Q문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서론으로 Q문서에 관해 압축하여 배경지식으로 제시한 부분으로, 내용은 어느 정도 맞다. 중간중간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리고 Q는 1800년대 초반에 등장한 것으로 20세기가 아닌 '19세기'다. 더구나 양식비평이 아니고 '자료비평'이다.
이렇게 역사가 흐르면서 소위 Q문서와 관련하여 가설이 정설로 변했다. 우스운 말이지만 가설도 자꾸 연구하다보면 정설이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학문의 오류일 수도 있다.
->여기부터 헛소리가 시작된다. 수많은 가설들이 연구되다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설명할 수 있을 때 정설이라 표현되고 증거들이 뒷받침 된다면 이론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설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한다. 사전을 1회라도 찾아봤을까?
그러면 Q문서 이론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을까? 놀랍게도 Q문서를 주제로 삼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이에 대한 문제점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를 감춘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닐 성 싶다. 학자들이 구태여 숨겨두고 싶어 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들추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Q문서와 관련된 역사적인 문제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역사상에 Q문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에 Q문서가 존재했다면 두 가지 현상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이런 어록 수집을 전승하는 사본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본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다른 복음서들을 언급하는 것처럼 이런 어록 수집을 언급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언급 역시 전무하다. 사본의 부재와 교부들의 침묵은 Q문서란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Q자료 설을 지지하는 어떤 학자의 솔직한 고백을 따르자면, Q란 단지 학자들의 합의(a scholarly convention)에 지나지 않는다.
->‘교부들의 언급이 없고, 사본이 없으므로 없었다’ 는 주장은 Q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나타낸다. Q 공동체는 갈릴래아 촌동네에서 유대-그리스도인 들이 만든 것으로 압도적 증거들로 추정되고 있다. 그곳에 교부언급이니 사본필사니 하는 주장은 그저 헛소리다. 그런 언급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 제국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것을 필사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10%가 채 안되지만, 그마저도 모였다는 도시에서 진행된 일이다. 그러나 Q공동체는 속국의 촌동네로 자기네 사용어인 아람어도 겨우 말하던 곳이다. 그 공동체는 묻혔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자가 교수고 신학대학원의 총장이니까, 저자 스스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 했기에 본인(전투적무신론)이 이렇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이지, 어디 아프리카 시골에 5명 출석하는 교회 목사가 입으로 주장했다면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더구나 Q문서의 시대는 2세기부터 시작된 교부시대가 아니라 1세기 사도시대 이다. Q문서는 최소 50~6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도들이 다 살아있을 시점이다. 교부의 언급은 당연히 없다. 왜냐? 사도시대니까. ‘강력한 증거’ ‘학자’ 운운 하면서 무슨 시대인지도 판단을 못하고 있다.
둘째로 Q문서와 관련된 내용적인 문제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고 있는 어록집이다. 사실상 학자들은 Q문서에 세례자 요한의 말도 일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마 3:7-12/눅 3:7-9,16-17). 따라서 Q문서에는 치병이나 이적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언급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록만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을 중요한 예로 제시한다. Q문서는 도마복음을 닮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간단히 말해서 시대착오적이며 탈선적이다. 왜냐하면 도마복음은 후기문서인데다가 초대교회에 의하여 이단시된 문서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빼먹은 채 어록만으로 복음서를 작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후에 이단들이나 하는 행위였다.
->Q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린 헛소리다. Q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부분은 분명 들어있다고 추정한다. 이는 독일어 Quelle ‘원천, 근원’ 이라 부르고 그것이 복음서에서 분리해낸 것이기에 대부분이 예수의 어록이니까 우리는 그냥 ‘예수 어록’ 이라 부르는 것을 교수는 심히 착각하고 있다. ‘Q=예수어록’ 이 아니고, ‘Q≒예수어록’ 이다. 허나 이 교수는 ‘어록이 아닌 부분이 나왔으니 거짓’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본인이 제안하건대 ‘정경복음서 이전의 예수연관문서’ 라는 표현으로 Q를 대신한다면 아마 입도 뻥긋 못할 것이다. 이 교수는 Q가 무슨 뜻인지 서론에 직접 제시해 놓고, Q는 어록이라고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이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단어의 뜻을 잘못 외웠던지, 둘째는 서론을 베껴왔던지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나는 후자에 걸겠다.
더구나, Q에는 예수의 기적이 2개나 나온다. 구체적으로 '로마 백인대장의 종을 말만으로 고친 기적이야기'와, '귀신을 내쫒은 것을 보고 예수를 바알세불과 한편으로 몰아간 기적이야기'로 2개씩이나 나오는데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헛소리다. Q를 1회도 정독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뭔지도 모르면서 없다고 주장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도마복음을 중요한 예로 제시하는 것은 맞지만, 후기문서니 이단문서니 언급은 그냥 웃길 뿐이다. 초대교회에 ‘정통’은 없다. 문자주의도 영지주의도, 마르키온파도 에비온파도, 그 누구도 정통도 이단도 아니었으며, 최초의 정경목록을 짠 사람은 원-정통 기독교(proto-orthodox christianity)가 후대에 주류집단이 되어 이단으로 정죄한 마르키온파이다.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마르키온의 정경목록을 늘려서 신약성경 만들어 놓고는 현대에 들어서 마르키온의 판단이 더 정확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는 시점에 그냥 헛소리다. 마르키온은 누가복음+바울서신으로 정경을 짰고, 바울 목회서신 3개와 공동서신은 물론이고 계시록과 다른 복음서 까지도 비정경이라 주장한 인물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하여 현대신학에서 목회서신은 물론 공동서신 까지도 의심할 바 없는 차명서신으로 분류된다. (마르키온이 목회서신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목회서신이 만들어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게 여겨지기도 한다. 2세기의 인물이 목회서신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 쓰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나저러나 위경이다.)
도마복음의 최초 원본은 1세기 중반~2세기 초 쯤에 생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며(교부들의 언급을 포함한 최종 결론), 지금 남아있는 사본은 2~3세기의 것이다. 몇몇 보수주의 학자들이 2세기 후반이라는 둥 헛소리를 떨지만, 지금 남아있는 사본이 원본이라고 백번 양보해 가정해도 2세기 중반을 못넘어간다. 어쨌든 그때까지도 이 문서는 살아남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로 이단이었기에 작성조차 허용하지 않고 탄압했다는 주장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더구나 정경인 베드로후서보다 앞선 시대거나 동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주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로마에서 종교로 인정받고 후에 국교로 인정되자 정통이 된 주류가 이단이라 명명한 집단을 일방적으로 탄압하고 그들의 문서를 불태운 사례는 있다.
게다가 Q문서의 내용적인 문제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수난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빠진 것은 물론이고 수난을 예고하는 말씀도 없다. 최근에 이런 점에 착상하여 기독교를 수난 없는 기독교로 다시 정의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의 복음규칙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하지 않는 Q문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없고, 이에 근거하여 수난 없는 기독교를 제시하겠다는 시도는 역사상의 어떤 이단보다도 못한 시도이다. 심지어 아주 치명적인 이단들 가운데 수난을 재해석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수난을 생략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의 수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니며 정통이 아니라는 주장은, 근본주의 변증론을 맛만 본 변론이다. 재정의니, 복음규칙이니, 이단이니 하는 소리로 보아 반박 가치 없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쓰자면, Q문서에 수난이 없는 이유는 50년대에 지어 졌다고 여겨지는 이 문서의 공동체가 ‘목격자들과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니까. 수난 내용은 예수가 살던 갈릴래아의 40~50년대에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쓸 필요가 없지만, 예수의 행적과 말은 한 세대가 지나 없어져 가고 있으니까. '갈릴래아 촌동네의 (예수를 직접 경험했거나 들은) 사람들이 모였던 50년대의 유대교 나자렛 메시아파' 가 이 공동체다.
Q문서의 내용적인 문제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학자들이 정리해놓은 Q문서의 구절목록이 그 존재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Q문서에는 묶음으로 나타나는 구절들도 있지만, 한 두 절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구절도 있다. 예를 들면 마 15:14/눅 6:39, 마 13:16f./눅 10:23f., 마 17:20/눅 17:5f., 마 19:28/눅 22:28-30 같은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담이나 격언처럼 너무나 유명한 단문들이기 때문에 이런 정도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암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얼른 알아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신 순간부터 사람들이 바로 암송하여 구전으로 널리 회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들이 반드시 Q문서와 같은 어떤 문서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유명한 짧은 구절에 기초가 되는 Q문서가 있었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구전이 뭔지, 속담이 뭔지, 격언이 뭔지에 대한 단어 정의도 모르는 듯 보이며, 전승과정은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을 단 1회도 해보지 않은 말이다. 즉 아무 의미가 없는 허공에 짖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구절들을 일일이 살펴본 결과 내 생각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는 우리속담 마저도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역질문 할 수 있는 부분은 "단문은 Q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묶음은 Q라고 주장 하는거요, 아닌거요?" 이다.
이와 더불어 Q문서의 문제점에 부수적인 것을 한 가지 첨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소위 Q문서를 재구성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어려움은 두 복음서에 공통적인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생각처럼 자구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Q문서를 사용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왜 차이가 생겼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쓴다. Q문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저자의 정신승리가 돋보인다. ‘아니라 말하면 될 것을’ 은 ‘믿음이라 말하면 될 것을’ 하는 투의 말이다. 전형적인 개신교(혹자는 개독이라 부르는)스러운 답이다. '그냥 아니라 부인하면 돼'. 그럼 내가 이 교수에게 역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Q가 아닌, 또 다른 '공관복음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시오" 이다. 아마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된다. 예상 답변은 '믿음' 이 아닐까?
정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학자들이 재구성한 Q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속적인 흐름(a continuous narrative)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 현상을 바꾸어 말하자면 Q문서의 기록자는 아무런 논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집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과연 초대교회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누가 감히 그런 일을 시도했을까, 그런 시도가 초대교회에서 용인되었을까, 그런 시도에서 나온 문서를 과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 기꺼이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허망한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복원한 Q문서를 단 ‘1회’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논리도 없고, 뭐가 들어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있었다고 하는게 초대교회에서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하는 말은 교수인 저자가 스스로 ‘나는 모르오’ 하고 말하는 꼴이다.
*전투적무신론의 총평 : Q문서에 대해 언급하고 반박하려 하지만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알맹이 없는 주장이다. Q문서를 단 ‘1회’도 정독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실천신학 따위의 허접한 학문으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신약학으로 독일까지 가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비 목사들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이가 없다. 독일에서 나온 Q문서설(Quelle 는 독일어다)을 독일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인가?
원본글 : http://gensdei.org/zboard/view.php?id=poe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5
이 글을 2600명 이상이 읽었으며, 다른 홈페이지에서도 복사해가고, 소식지에 실렸었다는 것도 정말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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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못하는 메시아론 변증 - 다윗의 후손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아(히브리어:메시아, 그리스어:크리스토스) 왕이 되었고, 그에 대한 전설 등으로 인해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온다는 성경구절을 제시하면서, 다윗이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 까지 한다고 써있다.
쉽게 말해, 메시아의 조건에 '다윗의 후손'은 필수이다. 그리고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었다고 주장되었다.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불린 사실은 공관복음서+사도행전 이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와 무신론 까지 인정하는 바울 친서 '로마서 1:3' 에서도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되고 있다. 심지어 메시아론 변증과 아무 상관없는 요한복음 조차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예수 스스로 '나는 다윗의 후손이다'며 명백히 하진 않았지만, 복음서 저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 칭했다.
유대교에서는 부계혈통상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것도 맞고,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라 칭함 받은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에서 다윗의 후손이라 적힌 부계혈통의 증거를 들이민 것도 다 인정한다. 문제는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처녀잉태로 태어났으므로 아버지가 없다.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예수 탄생에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으니 그 족보의 근거는 무시된다.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이 틀림이 없더라도, 예수를 낳도록 한 것은 요셉이 아니므로(마리아와 성령이다), 따라서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은 아직 입증되지 못했다.
더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그리고 마태와 누가의 족보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태복음 족보는 양아버지 요셉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었으나, 유대교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에서도 엄청난 비판을 불러왔다. 당시 유대교는 여자는 물건과 동일시 되었던 시절이라 모계혈통은 싹 무시되었기에 근거로 쓸 수 없고,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가 부계혈통 다윗의 후손을 변증한 것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마태는 요셉의 족보에서 일부러 누락시켜 14대를 맞춰 썼고, 누가는 그냥 길게 썼다. 두 복음서 작가의 족보의 근거는 달랐다.
더구나 마리아는 레위지파일 가능성도 있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스갸랴와 그의 아들 세례자 요한은 레위지파다. 하지만 마리아가 어디지파 출신인지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설일 뿐이다. 친척이라는 단어로 몇 촌 관계냐를 따진다면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있기 때문에, 마리아는 유다지파일 가능성 역시 존재하며 그것이 맞다고 여겨지더라도 여자의 족보는 근거로 쓰일 수 없다. 그것을 가지고 마리아 족보네 하는 것은 문제해결을 못하고, 그 근본을 모르니까 떠드는 헛소리다. (이 마리아 족보라는 잘못된 해석이, 설명하는데 편하고 믿는데 편하니까 너도나도 이유는 모른채 설명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퍼져있다)
두 족보에서 다른 점을 살펴봐야 할 부분은 다윗의 친아들(마태-솔로몬, 누가-나단),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의 아버지(즉, 예수의 친 할아버지. 마태-마탄, 누가-엘리) 부분 뿐이다. 이는 두 족보는 같은 자료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며, 누구 한명의 잘못도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리아 족보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요셉이 마리아의 아버지(예수의 외할아버지)에게 혈통을 잇도록 족보를 이었네 어쩌네 하는 주장을 펼쳤었다.
족보에 관한 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역시 셀 수 없는 가정을 토대로 경우의 수를 나열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헛된 주장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두 족보의 이야기는 '부계혈통상 다윗의 후손' 이라는 메시아의 조건을 변증하기 위한 자료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태복음서의 아브라함-다윗-(요셉)-예수 로 이어지는 족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다지파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는 메시아 라고 변증하기 위한 족보이고,
누가복음서의 아담-아브라함-다윗-(요셉)-예수 로 이어지는 족보는, 신의 첫 작품 아담의 후손이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다지파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는 메시아라고 변증하기 위한 족보이다.
복음서의 족보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전부다.
허나, 공교롭게도 유대교로 부터 비판을 받는 '친아버지가 없다'는 부분에서, 마태와 누가 만이 족보를 전했고, 이 두 복음서만이 처녀잉태를 전한다.
마가복음은 마태,누가복음 보다 먼저 지어졌는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족보는 없지만, 거지가 소리치는 부분(마가10:47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마가복음만 있었다면 유대교에서 족보의 유무논쟁만 불러일으켰겠지만, 마태와 누가복음이 족보를 실으면서 처녀잉태를 동시에 실었기 때문에 변증론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를 마치 다윗의 후손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예수는 신이며 삼위일체 라며 아는체 하는 소리는 그냥 무시하면 되겠다.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족보를 실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다윗의 후손 여부도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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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신교 초기 상황을 알 수 있는 글
1917년 발표된 소설가 이광수의 무정 中 일부
※참고 : 약 100년전 한국어인 까닭에 지금과 맞춤법과 표현이 일부 다르다. 소설에서 퍼온 것이므로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다. 단지 조선의 개신교 초기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어떠한지를 제시할 뿐. 1885년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후 약 30년 후에 발표된 소설이다.
79
김장로의 서재는 양식으로 되었다. 그가 일찍 미국 공사로 갔다 와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서양식 생활을 하려 한다.
방바닥에는 붉은 모란 무늬 있는 모전을 깔고 사벽에는 화액(畵額)에 넣은 그림을 걸었다. 그림은 대개 종교화다. 북편 벽으로 제일 큰 화액에는 겟세마네에는 기도하는 예수의 화상이 있고 두어 자 동쪽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화액에 구유에 누인 예수를 그린 것이요, 서편 벽에는 자기의 반신상이 걸렸다. 다른 나라 신사 같으면, 종교화 밖에도 한두 장 세계 명화를 걸었으련마는, 김장로는 아직 미술의 취미가 없고 또 가치도 모른다. 그는 그림이라 하면 종교에 관한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기타에는 옛날 산수 풍경이며 지란매죽 같은 그림은 얼마큼 귀하에 여기되, 이러한 그림은 서양식으로 차려 놓은 방에는 부적당한 줄로 안다. 그러고 서양식 인물화라든지 그중에도 미인화, 나체화(裸體畵) 같은 것은 별로 보지도 못하였거니와 보려고도 아니하고 본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미술이라는 말도 잘 알지 못하거니와, 대체 그림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한다. 더구나 조각(彫刻) 같은 것은 아마도 그의 오십 년 생활에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종교와 같이 귀중히 여기는 예술(藝術)도 그의 눈에는 거의 한푼 어치 가치도 아니 보일 것이다. 서양 사람의 생각으로 그를 비평할진대 '예술을 모르고 어떻게 문명 인사(文明人士)가 되나' 하고 의심할 것이다. 실로 문명 인사치고 예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장로는 방을 서양식으로 꾸밀 뿐더러 옷도 양복을 많이 입고, 잘 때에도 서양식 침상에서 잔다. 그는 서양, 그 중에도 미국을 존경한다. 그래서 모든 것에 서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과연 이십여 년 서양을 본받았다. 그가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에는 아마 서양을 본받기 위함인지 모른다. 그리하고 그는 자기는 서양을 잘 알고 잘 본받은 줄로 생각한다. 더구나 자기가 외교관이 되어 (미국 서울) 워싱턴에 주재하였으므로 서양 사정은 자기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가 없거니 한다. 그러므로 서양에 관하여서는 더 들을 필요도 없고 더 배울 필요는 무론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문명 인사로 자임한다. 교회 안에서와 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나 다만 그렇게 인정하지 아니하는 한 방면이 있다. 그것은 서양 선교사들이라. 선교사들은 김장로가 서양 문명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을 안다. 김장로는 과학(科學)을 모르고, 철학(哲學)과 예술(藝術)과 경제(經濟)와 산업(産業)을 모르는 줄을 안다. 그가 종교를 아노라 하건마는 그는 조선식 예수교의 신앙을 알 따름이요, 예수교의 진수(眞髓)가 무엇이며, 예수교와 인류와의 관계 또는 예수와 조선 사람과의 관계는 무론 생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문명이라 하면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 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 서양의 문명을 이해(理解)한다 함은, 즉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한다는 뜻이니, 김장로는 무엇으로 서양을 알았노라 하는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함을 안다. 그러므로 그네는 김장로를 서양을 흉내내는 사람이라 한다. 이는 결코 김장로를 비방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참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의 문명의 내용은 모르면서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 집을 짓고, 서양식 풍속을 따름을 흉내가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리요. 다만 용서할 점은 김장로는 결코 경박하여, 또는 일정한 주견이 없어서, 또 다만 허영심으로 서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양이 우리보다 우승함과, 따라서 우리도 불가불 서양을 본받아야 할 줄을 믿음― 깨달음이 아니요― 이니 무식하여 그러는 것을 우리는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는 과연 무식하다. 그가 들으면 성도 내려니와 그는 무식하다. 그는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깨달을 줄로 안다. 하기는 그에게는 그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나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알 수가 있을까. 십 년 이십 년 책을 보고, 선생께 듣고, 제가 생각하여도 특별히 재주가 있고, 부지런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야 처음 보는 남의 문명을 깨달을 동 말 동하거든, 김장로가 아무리 천질이 명민하다 한들 책 한 권 아니 보고 무슨 재주에 복잡한 신문명의 참뜻을 깨달으리요.
그러나 김장로는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지 자기는 잘 모르면서도 서양 사람들이 다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내므로 자녀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안다. 안다는 것보다 믿는다 함이 적당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는 마침내 문명을 알게 될 것이라. 이리하여 조선도 점점 신문명을 완전히 소화(消化)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와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녀들은 잘 알고 하는 것이언마는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리하여 소위 신구 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 들어올 때에 으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마는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그러나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이 자기 아는 이상 알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신구 사상 충돌의 비극은 그 책임이 흔히 낡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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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필사오류1, 예수에 의하면 형제는 몇번 용서해야하는가?
마태(마태오)복음 18장 22절
21절 : (공동번역)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절 : (번역에 상관없이)예수는 몇번이고 상관없이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몇 회인지 세어 율법화 시켜 78회 부터, 491회 부터는 정죄해도 된다고 이해하는 놈은 미친놈이다.
그러나 몇 회인지에 대해 번역본 별로 다르다.
70 X 7 = 490회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개역한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현대인의성경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KJV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NKJV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
DRA Jesus saith to him: I say not to thee, till seven times; but till seventy times seven times.
NASB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
77회
천주교성경(2005)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NIV Jesus answered, "I tell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NRSV Jesus said to him, ‘Not seven times, but, I tell you, seventy-seven times.
Catholic NJB Jesus answered, 'Not seven, I tell you, but seventy-seven times.
*천주교 성경(2005)은 77회에 주석을 달기를 490회라 적힌 것도 있다고 적었다.
77회가 타당하다
-> 창세기 4:24에서도 7회와 77회를 동시 언급하고 있다.
490회가 타당하다
-> 7 x 70은(7은 완전수, 70은 온세상 민족 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로 갈려있다.
누군가가 이해를 잘못해서 다르게 적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필사하는데 힘들었던 어느 사람이 헷갈려서 잘못 적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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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성경의 역사 - 공동번역성서(개신교의 유일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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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성서(1977)
개신교에서 고유명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천주교와 함께한 공동번역성서가 최초이자 마지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측 번역자는 문익환 목사인데, 이분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하죠. 민주화 운동하다 투옥되신.
공동번역성서는 그동안 사용했던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버전(구약은 히브리어 BHK, 신약은 그리스어 GNT, 제2경전(외경) LXX(Septuaginta))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고유명사를 원래 발음과 비슷하게 하자고 합의하였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기로 하였으며, 몇몇 한글 고유명사는 통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 Paul의 경우, 그리스어는 파울로스인데,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바울로 라고 합의합니다.
개신교의 하나님과 천주교의 천주님 둘다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고 표준어에 맞는 하느님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개신교의 여호와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야훼로 고쳤고요.
따옴표와 쉼표와 물음표 등을 사용하기도 했고요. (1911부터 시작되어 제일 나중에 나왔다는 개역개정판(1998)조차 따옴표와 쉼표와 물음표가 없습니다.)
그렇게 공동번역성서가 나오고 나서는 천주교의 공식 성서가 되었고, 정교회와 성공회 등에서도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인데, 개신교의 소수종파만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고 다수는 반대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읽기 쉽다' '성경의 경전성이 떨어진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포기할 수 없다' 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지금 들어도 웃음만 나올 뿐이죠. 성경도 모르는 것들이.
수 많은 번역을 거친 영어버전을 번역해 수 많은 오역과 이해하기 난해한 구절과 이상한 고유명사를 사용한 성경이 진짜라는 투로 말하고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성경은 가짜라는 투로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나오죠.
따옴표와 쉼표와 물음표 조차 없는 성경이 경전성이 있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거의 전부가 개역한글판 그대로 갑니다.
가장 웃긴 것은, 공동번역성서의 판권은 대한성서공회에 있었는데 대한성서공회는 개신교 단체였고, 천주교 등 에는 돈 한푼 안 줬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전부 공동번역성서를 샀습니다.
열린 사고를 했던 문익환 목사와는 달리 기존 개신교 사람들은 전부 그 뜻에 반발하여 조선시대 이름을 100년이 넘게 가지고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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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성경의 역사 - 새번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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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한글(1961)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번역으로 공동번역성서(1977)가 등장했는데 '대다수 개신교회'만 배척했습니다.
개신교계 입장에서 100년 가까이 사용해온 잘못된 음역(마태,마가,누가,바울 등)과 잘못된 표준어이자 북한 지역의 방언(하나님)을 공동번역이 서로 맞추기로 했는데 전통을 이유로 반발했습니다. 너무 읽기 편해서 권위가 떨어진다, 하나님 단어를 포기 못하겠다 등의 한심한 이유로 말이죠.
하지만 자신들의 개역한글(1961)보다 훨씬 읽기 편하고 내용 이해가 쉬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죠. 자신들의 전통적 용어는 유지하고 싶고, 읽기 편한건 좋으니 머리굴려서 만든게 표준새번역(1993)입니다.
1998년에 나온 개역개정판까지도 페르시아를 바사라고,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사용하지요. 어떻게 읽어야 이렇게 나오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몇몇 단어들은 바꾸긴 했지만 거의 전부 「1911 성경」을 따랐습니다.
1911->1938->1961은 영어성경으로 1911년 까지 번역한 것을 맞춤법만 개정하다보니 문제가 있었고, 공동번역을 따라해서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된 것을 번역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영어 이외의 버전에서 번역함과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공동번역을 따라했고, 기존 개신교의 용어들을 유지하는 것으로 개역한글을 따라해 표준새번역(1993)을 만들어 개신교회의 공식 예배용으로 사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공식으로 만들면 '공동번역의 장점 + 개역한글의 용어 유지 = 표준새번역'
그러나 성경에 무지한 개신교 사람들이 새번역을 만들때의 당초 목적과 달리 개역한글을 계속해서 고수하기로 결정하자 예배용으로 채택한 개신교는 거의 없었고, 결국 대한성서공회는 개역한글에서 맞춤법과 오역 일부를 개정한 개역개정(1998)을 내놓고 밀어주게 됩니다. 흔히 들리는 이야기로는 개역한글판의 저작권 기한이 거의 끝나가자 장사 목적으로 급히 출시한 성경으로 보기도 합니다.
대한성서공회와 개신교계에서는 개역개정판을 밀기로 했고 현재 개역개정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교회가 상당수 되지요.
표준새번역(1993)은 후에 새번역(2001)으로 개정되었는데, 문체와 단어 몇개를 조금 바꾸었을 뿐 큰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개역개정(1998)을 밀기로 함에 따라 표준새번역(1993)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했고, 절판되었습니다. 그후 새번역(2001)이 출간되어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습니다.
결국 대한성서공회와 개신교계가 입 맞추어 훨씬 좋은 타 번역을 없애버리고「1911 성경」을 「1998 성경(개역개정)」까지 가지고 와서 그대로 가는 꼴입니다.
아직도 개역한글을 사용하는 곳에선 말합니다. '개역개정(1998)은 장사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니 개역한글(1961)을 사용하겠다' 이는 아주 무식한 말 임은 세개의 글을 통해 입증하였습니다.
세개의 글에서 작성된 성경 이외의 성경버전은 개신교가 처음온 1885년부터 120년 넘는 시간동안 다양한 이유(장사용, 예배용, 북한용, 어린이용, 낱권 등)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사용된 적도 거의 없으며 접할 기회도 없고 역사에 한줄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세계역 성경 한글번역판, 말씀보존학회의 킹제임스흠정역 한글번역판 등은 워낙 소수종파만 사용하는지라 역시 큰 틀은 볼 수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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