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

유대교 2014. 1. 30. 22:01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


*사용 용어는 대부분 공동번역을 따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의 종교(유다교란 표현이 없다)는 하나였다.


(CE 1~30년대 초중반) 예수가 살던 1세기 전반부에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혁명당(이 세 분파가 성전을 인정했다), 에세네파, 세례자 요한파(이 두 분파가 성전을 부패했다며 불인정했다)가 존재했다.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에는 분파는 있을지언정, 이단은 없다. 이 분파들은 각자 특색이 있었으나 공통점도 있었고 차이점도 적지 않았다. 물론 상당수 무지몽매한 평민들은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갈릴래아 땅은 유다 땅보다 북쪽에 있던 사마리아 땅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곳이다. 즉, 갈릴래아가 북부, 사마리아가 중부, 유다가 남부이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예수는 태어나고 자랐다.


(CE 30년대 중후반) 식민지는 원래 수탈하라고 강제로 빼앗은 땅이지만, 특히 갈릴래아에서는 수탈이 극심했다. 먹고살기 바쁜 그 와중에 목수(번역은 목수이나 실은 석공에 가깝다. 결국 일용직 노동자)나 하던 무식한 자가 세례자 요한파에서 세례를 받고 배웠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정치범으로 사형 당한다. 배워봤자 얼마나 배웠다고 자신이 직접 토라(가르침, 율법)에 대해 떠든다. 갑자기 율법선생(랍비)이 되었다. 별거 아니던 놈이 율법에 대해 떠드니 갈릴래아 주민들은 무시하고 비웃는다. 더군다나 율법상 죄인들이나 소외된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식사를 같이 한다. 이를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비유하자면, 양반과 여자와 노비가 같은 밥상에서 같은 음식을 같이 먹은 것이다. 파격적인 행보이다. 그러다 갈릴래아에서 더 이상 활동이 안 되니 떠돌이 설교자를 시작한다. 이곳저곳을 돌며 가르치는데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다. 랍비처럼 제자들을 몰고 다니며 평민들이 주축이 된 소규모의 나자렛파를 형성했다. 예언자적 행동으로 종교와 성전과 성직자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가한다. 그에 화가난 지도자들은 예수가 몇 년간 활동하며 밉보인 것들을 다 트집잡아 식민지 지배국가인 로마에 고발한다. 죄목은 정치범, '국가의 왕(결국 이 국가는 하느님의 나라, 신정통치국가, 神國)'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정치범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사형당하자 나자렛파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CE 40년대~50년대 후반) 나자렛파를 이루었던 대부분의 평민들은 회당의 공적 예배와 더불어 집이 있는 사람의 집에서 예수가 했던 것처럼 같이 식사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승했다. 이 전승모임 중 갈릴래아의 전승모임은 Q공동체라 불리는 집단으로 초기에는 예수를 직접 봤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직접 목격자들이 사망해가자 Q복음서를 집필한다. 이 와중에 파울로스는 나자렛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스스로 나자렛파에 들어가 나자렛파를 변호했다. 파울로스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도시들에 가정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주었다. 


(CE 60년대~70년대) 그러다 파울로스는 참수형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혁명당은 독립전쟁(후에 역사가들은 제1차 유다독립전쟁이라 명명함)을 일으켜서 4년간 로마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무너졌다. 예루살렘 성전은 곧 하느님인 야훼가 있는 곳으로 야훼와 동급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의 신이 무너진 것이다. 성전의 무너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대 충격으로 다가왔고, 반 로마파인 에세네파와 나자렛파와 세례자 요한파가 갈망하던 세상의 종말인 '로마의 멸망과 신정국가의 회복'은 오지 않았다. 역시 반 로마파인 혁명당은 반란으로 낙인찍힌 역사에서 패배해 숙청되어 사라진다. 이에 더불어 성전이 타락했다며 사막으로 나가 생활했던 에세네파(쿰란 공동체) 역시 로마군에 의해 공격받아 사라진다. 사두가이파는 성전 제의에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성전이 무너지고는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스라엘 밖 나자렛파에서 제2복음서(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된다. 성전이 없어지고 나자 바리사이파는 회당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이것이 성전 유다교에서 랍비 유다교로의 전환이다. 


※번외 :  바리사이파가 전환시켜 이어가던 랍비 유다교는 CE 2세기에 입으로 전승되던 것들을 모아 미쉬나를 만들었고 이것이 탈무드의 토대이다.


(CE 80년대)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나자렛파를 경멸했고 회당에서 내쫒았다. 이러는 와중에 제1복음서(마태오 복음서)와 제3복음서(루가 복음서)가 해외에서 제작되고, 가정교회에서 모이던 나자렛파는 자신들만의 교리문서(소위 파울로스 차명서신과, 공동 서신)를 쓰기 시작한다. 시리아의 나자렛파(제1복음서의 저작 장소)는 Q공동체와 세례자 요한파를 흡수하게 된다.


(CE 90년대) Q문서, 제1복음서, 제2복음서, 제3복음서 모두 그리스어로 제작되었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나자렛파는 그리스어 성경(LXX)을 썼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고집하면서 얌니아 회의를 연다. 나자렛파를 축출하기 위해 그들이 보는 그리스어 성경에 대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성경 목록을 짰다. 그리고 나자렛파에 대해 메시아는 오지 않았으며,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회당에서 내쫒는다. 이스라엘 종교 두 분파가 서로에게 욕설을 하며 갈라선다. 그렇게 한개의 종교는 두 분파에 의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뉘게 된다. 바리사이파는 회당 중심의 랍비 유다교를 이어가고 있었고, 회당을 떠나 가정교회에서 만찬과 예배를 하던 나자렛파는 그리스도교가 되어 자신들에게 필요한 문서들(소위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것들)을 만들기 시작하고 조직화되었다. 이때 생겨난 복음서가 제4복음서(요한 복음서)이다. 나자렛파는 바리사이파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90년대 말,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요한의 묵시록이 작성된다.


이것이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의 상황이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의 하나이던 종교의 대부분의 분파를 없애고, 예수 한명을 보는 시각이 달랐던 두 분파는 두개의 종교로 갈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