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히친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리뷰

무신론 2014. 3. 26. 23:31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리뷰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1949-2011)

신은 위대하지 않다, 리딩, 논쟁, 인권 이펙트,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자비를 팔다, 키신저 재판 등의 책이 번역되어 우리에게 읽혀졌다.


히친스의 사망 후 그가 마지막으로 작성하였던 글들을 모아 출간된 책 'Mortality' 를 번역한 것이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 혹은 '자비를 팔다' 처럼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로 공격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삶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있었던 사색들을 담은 책이다. 그러므로 읽는 이에 따라서 다소 비판적인 논리나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그는 언론인이고 무신론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종교 토론도 서슴지 않고 했다. 우리는 무신론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관해 궁금한 것이 많다. 많은 종교인들이 생각하듯, 무신론자도 죽음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이 되어 결국 신을 찾고 죽음을 맞게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 주장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 위해 그는 죽음 앞에서 글을 썼다.


그는 1장에서 설명하듯 무신론의 지조를 지키는지 아닌지를 사람들에게 테스트 당한다. 신을 믿는 종교인들은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고 나서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회심을 하는지 안하는지 내기를 건다. 내 생각엔 아마도 이러한 행동은 안토니 플루(Antony Flew)의 회심(변심)에서 비롯된 듯 하다. 안토니 플루는 영국 철학자로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다가 죽기 전 신을 믿었다. 그러한 일에 무신론자들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고, 종교인들은 환영했다. 아무튼 이러한 내막 아래에서 히친스가 지조를 지키는지 아닌지는 아마도 초유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히친스는 결국 무신론의 지조를 지켰다.


2장부터 마지막 장인 8장 까지는 식도암과 폐렴 등의 병에 대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다운 담담한 어조로 그에 대해 설명하고 다소 농담섞인 말들을 타인과 주고 받았음에 대해 적고 있다.


맨 마지막은 후기로 히친스의 아내가 바라봤던 남편의 모습을 적은 것이다. 남편과의 편지 등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그리움과 남편이 '당당했음'을, 남편이 병마와 싸우는 과정을 지켜본 아내의 심정으로 글을 적은 것이다. 


히친스 다운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읽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 히친스가 '병과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음'에 대해서는 얻을 것이 있는 책이나, 논쟁을 알고자 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역자에게 아쉬운 점이 몇가지 있다.

역자는 그의 장례에 참여했던 살만 루시디에 대해 별다른 언급 없이 넘어갔다. 이미 종교와 무신론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책이나 언론을 통해 그를 접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알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장례 참여자로써 넘어갈 것 같다. 살만 루시디는 '악마의 시' 라는 작품을 써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의 목에는 현상금도 걸고, 그 작품과 관계된 사람들은 테러를 당해 부상 혹은 사망했다. 이를 적어주었다면 아마도 독자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 성서에 대한 인용은 다섯 구절 미만이지만 개역개정판을 사용한 것에 대해 나는 그렇게 좋지 못한 선택이라 본다. 나라면 공동번역으로 인용했을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8장 16~20절 후대 창작인가?

종교경전/신약성경 2014. 2. 18. 04:46

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8장 16~20절 후대 창작인가?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이 구절에 대한 주석과 설교들은 대부분이 예수는 부활하여 종말의 때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결국 ‘선교 열심히 합시다’ 로 귀결된다.


본문(공동번역)


-1부

16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ㄱ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부

18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ㄱ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19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ㄱ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20ㄴ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1부

일단 16,17,18ㄱ 은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16절>마태오는 사도 중에 한명인데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지 않고 3인칭 보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의심하는 사람들’에 속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17절> ‘절하였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형 ‘προσκυνέω(프로스퀴네오)’는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15회, 마르코의 복음서 저자가 2회,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 저자가 7회, 요한의 복음서 저자가 7회 사용하는 단어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애용하는 단어이다. 엎드려 절한 상황도 가필했다.


<18절ㄱ>더군다나 '가까이 오셔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합성어 ‘προσέρχομαι(프로스에르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57회, 나머지가 37회 사용하는 단어로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즐겨 쓰는 단어이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καὶ προσελθὼν ὁ Ἰησοῦς + αὐτῶν, αὐτοῖς)’는 마태오의 복음서 17장 7절에서 변모 사건에도 있는데, 이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베낀 것이고, 루가의 복음서 저자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꼈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는 변모 사건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끼면서 17장 7절(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를 가필했다. 즉,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문체다.


-2부

18ㄴ~20 은 마태오의 복음서가 만들어진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전승 및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18절ㄴ> 세 개의 절에 세 개의 ‘모든’ 이 등장한다. ‘모든’을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19절ㄱ> 선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사람으로 진화하였다. 이는 예수의 행적, 삶,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는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대하여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끼면서 24절(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를 가필했다. 이것을 가필한 이유는 초대교회가 이스라엘에게 메시아인 예수를 믿게 하는 것에 대하여 한계가 왔기 때문에, 선교의 대상을 이방인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예수의 삶이 이스라엘에게만 이루어져 이방인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차마 그 이야기를 창작해 내진 못하고, 이방여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필하고 맨 마지막 부활이야기에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라는 것으로 창작 및 가필하여 정당화 하는 것이다.


<19절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루가 공동체 및 초대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고, 파울로스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 문서 디다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되어있으며 ‘주님의 기도’ 또한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그대로 베껴왔다. 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부분들 까지도 베껴온 것이 명백하다. 이 문서는 시리아 교회에서 있던 것이므로, 이 문서보다 살짝 앞선 연대의 마태오의 복음서는 분명 시리아 교회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는 원형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로 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창작이자 전승이다.


<20절ㄱ> <19절ㄱ>에 이어진다. 가르침은 산상설교를 필두로 하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20절ㄴ> ‘너희와 함께 있겠다(ἐγὼ μεθ ὑμῶν εἰμι)’는 LXX 하까이서 1장 13절의 후반부 ‘ἐγώ εἰμι μεθ ὑμῶν’를 베낀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생각하자면 1부는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 2부는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창작 및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

유대교 2014. 1. 30. 22:01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


*사용 용어는 대부분 공동번역을 따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의 종교(유다교란 표현이 없다)는 하나였다.


(CE 1~30년대 초중반) 예수가 살던 1세기 전반부에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혁명당(이 세 분파가 성전을 인정했다), 에세네파, 세례자 요한파(이 두 분파가 성전을 부패했다며 불인정했다)가 존재했다.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에는 분파는 있을지언정, 이단은 없다. 이 분파들은 각자 특색이 있었으나 공통점도 있었고 차이점도 적지 않았다. 물론 상당수 무지몽매한 평민들은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갈릴래아 땅은 유다 땅보다 북쪽에 있던 사마리아 땅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곳이다. 즉, 갈릴래아가 북부, 사마리아가 중부, 유다가 남부이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예수는 태어나고 자랐다.


(CE 30년대 중후반) 식민지는 원래 수탈하라고 강제로 빼앗은 땅이지만, 특히 갈릴래아에서는 수탈이 극심했다. 먹고살기 바쁜 그 와중에 목수(번역은 목수이나 실은 석공에 가깝다. 결국 일용직 노동자)나 하던 무식한 자가 세례자 요한파에서 세례를 받고 배웠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정치범으로 사형 당한다. 배워봤자 얼마나 배웠다고 자신이 직접 토라(가르침, 율법)에 대해 떠든다. 갑자기 율법선생(랍비)이 되었다. 별거 아니던 놈이 율법에 대해 떠드니 갈릴래아 주민들은 무시하고 비웃는다. 더군다나 율법상 죄인들이나 소외된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식사를 같이 한다. 이를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비유하자면, 양반과 여자와 노비가 같은 밥상에서 같은 음식을 같이 먹은 것이다. 파격적인 행보이다. 그러다 갈릴래아에서 더 이상 활동이 안 되니 떠돌이 설교자를 시작한다. 이곳저곳을 돌며 가르치는데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다. 랍비처럼 제자들을 몰고 다니며 평민들이 주축이 된 소규모의 나자렛파를 형성했다. 예언자적 행동으로 종교와 성전과 성직자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을 가한다. 그에 화가난 지도자들은 예수가 몇 년간 활동하며 밉보인 것들을 다 트집잡아 식민지 지배국가인 로마에 고발한다. 죄목은 정치범, '국가의 왕(결국 이 국가는 하느님의 나라, 신정통치국가, 神國)'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정치범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사형당하자 나자렛파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CE 40년대~50년대 후반) 나자렛파를 이루었던 대부분의 평민들은 회당의 공적 예배와 더불어 집이 있는 사람의 집에서 예수가 했던 것처럼 같이 식사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승했다. 이 전승모임 중 갈릴래아의 전승모임은 Q공동체라 불리는 집단으로 초기에는 예수를 직접 봤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직접 목격자들이 사망해가자 Q복음서를 집필한다. 이 와중에 파울로스는 나자렛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스스로 나자렛파에 들어가 나자렛파를 변호했다. 파울로스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도시들에 가정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주었다. 


(CE 60년대~70년대) 그러다 파울로스는 참수형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혁명당은 독립전쟁(후에 역사가들은 제1차 유다독립전쟁이라 명명함)을 일으켜서 4년간 로마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무너졌다. 예루살렘 성전은 곧 하느님인 야훼가 있는 곳으로 야훼와 동급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의 신이 무너진 것이다. 성전의 무너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대 충격으로 다가왔고, 반 로마파인 에세네파와 나자렛파와 세례자 요한파가 갈망하던 세상의 종말인 '로마의 멸망과 신정국가의 회복'은 오지 않았다. 역시 반 로마파인 혁명당은 반란으로 낙인찍힌 역사에서 패배해 숙청되어 사라진다. 이에 더불어 성전이 타락했다며 사막으로 나가 생활했던 에세네파(쿰란 공동체) 역시 로마군에 의해 공격받아 사라진다. 사두가이파는 성전 제의에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성전이 무너지고는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스라엘 밖 나자렛파에서 제2복음서(마르코 복음서)가 집필된다. 성전이 없어지고 나자 바리사이파는 회당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이것이 성전 유다교에서 랍비 유다교로의 전환이다. 


※번외 :  바리사이파가 전환시켜 이어가던 랍비 유다교는 CE 2세기에 입으로 전승되던 것들을 모아 미쉬나를 만들었고 이것이 탈무드의 토대이다.


(CE 80년대)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나자렛파를 경멸했고 회당에서 내쫒았다. 이러는 와중에 제1복음서(마태오 복음서)와 제3복음서(루가 복음서)가 해외에서 제작되고, 가정교회에서 모이던 나자렛파는 자신들만의 교리문서(소위 파울로스 차명서신과, 공동 서신)를 쓰기 시작한다. 시리아의 나자렛파(제1복음서의 저작 장소)는 Q공동체와 세례자 요한파를 흡수하게 된다.


(CE 90년대) Q문서, 제1복음서, 제2복음서, 제3복음서 모두 그리스어로 제작되었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나자렛파는 그리스어 성경(LXX)을 썼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고집하면서 얌니아 회의를 연다. 나자렛파를 축출하기 위해 그들이 보는 그리스어 성경에 대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성경 목록을 짰다. 그리고 나자렛파에 대해 메시아는 오지 않았으며,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회당에서 내쫒는다. 이스라엘 종교 두 분파가 서로에게 욕설을 하며 갈라선다. 그렇게 한개의 종교는 두 분파에 의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뉘게 된다. 바리사이파는 회당 중심의 랍비 유다교를 이어가고 있었고, 회당을 떠나 가정교회에서 만찬과 예배를 하던 나자렛파는 그리스도교가 되어 자신들에게 필요한 문서들(소위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것들)을 만들기 시작하고 조직화되었다. 이때 생겨난 복음서가 제4복음서(요한 복음서)이다. 나자렛파는 바리사이파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90년대 말,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요한의 묵시록이 작성된다.


이것이 1세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종교,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와 유다교의 상황이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의 하나이던 종교의 대부분의 분파를 없애고, 예수 한명을 보는 시각이 달랐던 두 분파는 두개의 종교로 갈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