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법 교수의 '과부의 헌금' 해석을 반박함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9. 21. 03:09

심상법 교수는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부산대학교(B.S.) 

부산고려신학대학원(M.Div.) 

Biblical Theological Seminary(STM) 

University of STELLENBOSCH(Th.D.) 


를 나왔다고 한다.


내가 반박할 글은 "막12장 : 성전에서의 논쟁과 가르침 / 심상법" (두란노출판사 '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이고, 먼저 나의 글부터 읽고 뒷부분은 그 교수의 글에 반박을 달았다.


이 글은 본인의 글 http://militantatheism.tistory.com/1 에서 일부 퍼온 것이다. 원본에 일부 가감하였다.


  B)헌금을 마치 없는 상황에서도 전부를 내야하는 정도의 것으로 생각한다

(누가복음 21:1~4=마가복음12:41~4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예수가 '액수나 비율이 중요한게 아닌, 헌금을 내는 마음가짐이 올바른 과부'를 보고 칭찬한 것 처럼 보인다. 이는 상당수 성경주석이 그렇게 적고 있는 것에도 한 몫 한다. 그러니 신자들은 자연스레 "xxx 목사님이 주석 단 거니까"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유명한 성경주석들도 그렇게 적고 있다. 


이 구절의 최대 실수는 '문맥을 무시하고 읽었을 때'에 발생한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말한 이 성전은 '제2성전(헤로데 대왕 성전)' 이다.


마가복음에서는 11:27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와 13:1 에서야 성전에서 나간다.

누가복음에서는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정확하게 써 있지는 않다.

20:1부터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어느날 벌어진 설교라고 적고 있고 21:37에서 낮에는 성전에서, 밤에는 올리브 산에서 지냈다고 적혀있다.


어쨌든 설교의 배경은 '성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과부의 헌금' 사건 바로 전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다(평행본문 마가 12:38-40)


45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의 구절을 잘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부의 헌금 사건은 율법학자를 비난하며 예시를 든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의 예시가 곧 생활비 전부를 넣게한 사건인 것이다.


2 렙돈 = 1 고드란트 = 1/64 데나리온

1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임금 (마태 20:2) 이므로 일당 5만원이라 치고 계산하면 약 781원 정도이다.


쉽게 생각해, 1000원 한 장 헌금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율법교사들은 이런것마저도 율법 운운하며 성전에 들어와 예물을 드리도록 해 가난한 과부의 돈을 꿀꺽 한 것이다.


이야기 구성을 다시 해보자.

예수 曰 "율법학자들의 율법강조를 조심해라. 율법학자들은 예복 입기, 장터에서 인사받기, 회당의 높은 자리 앉기, 잔치에서 윗자리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꿀꺽하면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율법학자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말하는 와중에 성전에 있는 헌금함을 보았는데 부자들이 100만원 수표 내는 것과, 과부가 1000원 내는 것을 보았다. 이 헌금함은 성전에 출입했으니까 돈 내라는 전형적인 율법적인 장치였다) "부자들은 돈이 넉넉한 와중에 100만원 냈지만, 과부는 당장 돈이 없는데도 1000원을 내었다. (액수는 제쳐두고)저 과부가 제일 많이 넣었다" (부자는 100만원 내도 생활에 지장받지 않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냈는데, 과부는 혜택을 받아야 함에도 율법을 운운하며 넣게할 정도로 더러운 놈들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자기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데도 전부를 넣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혜택을 받아야할 과부들이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함에 대한 예수의 분노이다. 과부가 왜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는 원본글(※십일조의 진실)에 적혀 있으니 참고하라.


더구나, 만약 이 부분을 예수가 과부를 칭찬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 흐름을 깬다. 마가복음 11장~13장과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간 후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았고, 그에 대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권한에 대해 문제 삼았으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비유로 이야기 하자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며, 바리새인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시험을 했고, 사두개인들과는 부활 논쟁을 벌였으며, 논쟁을 본 율법학자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고,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였으며(이 와중에 과부의 헌금이 나온다), 성전을 나가는데 성전이 전부 무너질 것이라 말하고 종말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가르친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3장의 내용까지 살펴보았다. 요약문만 읽어봐도 예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있으며 흥분해있다. 예수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고 얼굴은 찌푸려져 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하고 난리통이다. 시골촌놈을 어떻게 잡아볼까, 죽여볼까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까지 나선다. 성전에서 들어와서 나가는 순간까지도 예수와 대제사장과 율법교사들은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화가 나있다. 이 와중에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두 절도 채 안되는 부분인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이상하다. 허나 많은 주석서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그 대표격으로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심상법 교수의 해석을 꼽아보겠다.


다음 내용은 두란노 출판사의 '목회와 신학'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내용을 모아서 출판한 'HOW주석-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라는 책에 있는 것이다. 이 책 소개에 의하면 '국내 최고의 전공자들이 필진으로 참여' 했다고 한다. 그중에 심상법 교수는 마가복음 12장에 대해 주석을 썼다.


내용 전문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와 '굵은 글씨'는 본인(전투적무신론)의 글이다.


"막12장 : 성전에서의 논쟁과 가르침 / 심상법"

4.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가난한 과부(막 12:38-44)


이제 예수님은 두 종류의 극단적인 종교적 실천의 모습을 소개하심으로써 성전에서의 그의 사역을 종결짓고있다. 하나는 종교를 빙자한 서기관들의 그릇된 행동(중한 심판을 받을 행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무명의 가난한 과부의 헌신된 모습(칭찬 받는 기억될 행동)이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서기관들의 잘못된(인간적) 가르침(12:35-37)에 이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12:38-40)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12:40).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비유를 통해 제시되어 졌다. 그리고 연이어 이들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성전에서 자기 모든 소유(삶) 곧 생활비 전부를 바친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된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다가 올 예수의 희생(죽음)의 참다운 의미를 예시한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의 행동은 기독론(예수의 죽음)의 예시임과 동시에 제자도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가난한 과부의 행동이 기독론의 예시며 제자도의 모델이라는 것에 대해 웃고간다. 애초에 쓰레기 해석으로 시작한 주석이다.


특히 이 여인의 모습은 서기관들의 모습(막 12:38-40)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기관들의 모습은 성전제도의 타락한 모습(11-12장)과 관련되어있다. 결과적으로 성전 멸망의 요인은 이들의 모습 속에서 찾을 수 있다(12:3-9, 40과 13:1-2). 이들의 모습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회당의 상석과 잔치의 상좌를 원하는 것, 과부의 가산까지도 삼키는 것, 그리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들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올바른 예배의 시행과 함께 율법을 백성들에게 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성전예배와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확장하는 도구로 오용(남용)하였다. 


->전혀 대조를 이루지 않는다. 과부는 율법의 피해자이며,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율법학자들이 법을 운운하여 돈을 떼가는 것에 예수는 분노했다.


이처럼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중 마지막으로 소개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11-12장에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성전을 섬기는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성전(종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채우는데(과부의 가산[家産]까지 삼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어 구제에 힘썼다. 사실 이 여인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미천한 행동에 불과하였다. 그녀의 신분(과부)이나 경제적 형편(가난함) 그리고 연보궤에 넣은 돈(두 렙돈=한 고드란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칠 수 있거나 무시해도 좋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행동(눈에 띄는 긴 옷; 시장에서의 문안; 회당에서의 상좌; 잔치의 상석)과는 판이하게 달리 행동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에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다가올 자신의 희생을 예시한다.


->자신의 말 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다. 성전을 이용하여 과부의 가산을 삼킨 사례가 과부의 헌금이거늘, 과부가 구제에 힘썼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돈이야 말로 율법학자들이 오남용 했을 돈이다.


우리는 이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강도의 굴혈`과 같은 성전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타락한 성전의 예배 가운데에서도 정결하고 헌신된 사람은 있다. 사사기의 시대에도, 아합의 시대에도, 그리고 암흑기의 포로 후기시대에서도 신실한 사람은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어두움을 한탄하기보다는 한 자루 촛불이 되어 어두움을 밝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없이 헌신하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사람 말이다.


->가난한 과부가 모델이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하는 해석은, 일단 내용에도 맞지 않으며 "우리도 교회에서 그만큼 많이 바치고 헌신합시다" 하는 투의 이야기다. 사기에 가깝다.


성전을 떠나시기 전에 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그것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한 것(43-44절)은 과히 이례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하고 보 잘 것 없이 보이는 이 가난한 과부의 놀라운(?) 행동 즉 그녀의 전적 헌신과 희생("자기 모든 소유"[o[lon to.n bi,on auvth/j=her whole life])을 주지시킴으로써 다가올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 실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 알리고자 하였다. 사실 `자신의 모든 삶`(생계)을 연보궤에 던진 이 여인의 헌신적 희생의 행동은, 어느 학자(Wright 1982)의 지적처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40절) 타락한 성전제도와 기득권자들의 희생물일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희생 역시도 역사의 지평 위에서는 성전의 기득권자들(종교지도자들)의 희생물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구원의 놀라운 행동이었다(10:45).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타락한 제도 속에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계 모두를 바쳐야 하는 것(자발적이라 할지라도)은 결코 합리적인 행동일 수가 없다. 불의한 제도의 희생물처럼 보인다. 이점은 예수의 수난("많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타락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의 예언에 대하여 베드로가 반응한 것(책망)과 동일하다(8:31-33).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이와 같은 죽음이 우리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예수는 이 계획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희생의 길을 가셨다. 여기서 독자의 귀에 메아리쳐 남아있는 것은 단락의 마지막에 언급된 [그녀의 마지막 남은 두 렙돈을 의미하는] "o[lon to.n bi,on auvth/j=her whole life"이란 표현이다.


->과부의 헌금을 예수의 희생과 일치시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중간에 Wright 라는 학자의 해석이 올바르다. (전문이 없고 출처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문맥상 정말 해석이 올바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 'Wright'가 N.T.Wright 라면 성공회 주교이자 복음주의권의 최고학자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것을 인정치 않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맨 마지막에 그리스어를 언급하는데 아무 의미 없이 원문을 언급하는 것은 개신교의 무식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행동을 한다. 그리스어를 아는체 하면서 언급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뭐냐면, ὅλον τὸν βίον αὐτῆς 를 언급한 것이다. 그중에 βίον의 원형 βίος를 'life' 로 해석하면서 그녀의 모든 삶을 바친 것 처럼 이야기를 썼는데 완벽한 사기다. βίος 는 첫째로 'life'의 뜻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두번째 뜻 'that by which life is sustained, resources, wealth' 삶을 지속할 자원이나 부 의 뜻으로 쓰였다. 모든 성서 그리스어 사전은 두번째의 뜻에 괄호치고 이 구절을 써 넣었다. 사전도 찾아보지 않은 이런 거짓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히브리어,그리스어 원문'을 언급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른채 쓰는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점을 봤을 땐 놀랍지도 않다. 성서해석학의 교수가 말이다.


끝으로 제자들을 불러 이 여인의 행동을 그들에게 주지한 것(43절)은 제자도의 특별한 교훈으로 취급되어져야 한다. 이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과는 달리 제자들은 어리석은 제도적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그를 배반(가룟 유다)하거나 부인(베드로)하거나 도주(다른 제자들)함으로써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다. 그러나 사실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제도적 희생물(부끄러움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복음을 위한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누구든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 가난한 과부는 불의한 제도 속에서도 자기의 생계 전부 곧 그녀의 모든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연보궤에 던졌다. 이것은 과부들의 가산까지도 삼키는 그 당시의 기득권자들(종교지도자들)의 행동과는 너무도 다른 행동이었다. 이점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예수님의 모습(막 10:45) 속에서도 나타났다. 


->역시 방금의 연장이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행동의 예시로 바로 다음줄에서 예시를 들어주고 있는데도, 다른 부분을 언급하면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 과부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동은 앞으로 다룰 향유 부은 여인의 모습(14:3-9)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의 헌신에서 바친 것들의 외관적 가치는 너무도 다르지만 - 하나는 보 잘 것 없는 두 렙돈이고 다른 하나는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부인`(self-denial)의 행동이었다(Malbon 1991:599. cf. 막 8:34). 특별히 마가복음에서 무명의 여인들의 모습들(혈류증 여인[5:24-34]이나 수로보니게 여인[7:24-34] 그리고 가난한 과부[12:41-44]와 향유 부은 여인[14:3-9])은 제자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담대한 믿음`에서부터 `예수님의 자기부인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자기부인과 희생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 당시에 천한 여인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헌신`은 정말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들의 제자도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10:31)는 말씀을 여실히 입증되었다. 


->과부를 보고 예수는 속에서부터 욕이 우러나왔을 사건임에도 '과부의 아름다운 헌신' 이라 쓰레기 해석을 해놓고는 엉뚱한 사건과 연결짓고 있으며 '고귀한 것'이라 평하고 있다.



심상법 교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이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학 교수이며, 더군다나 정교수이다. 또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성경해석학 서론' 등을 집필하고 예비 목회자인 신학생을 대상으로 '신약성경 해석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을 강의하고 책까지 출판하며 마가복음에 대한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평생을 해석에 목을 매는 사람이 해석 방식과 해석 능력이 X판이며 방법론 부터 X판이라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시사한다.


그 문제점은 곧 총신대학교 및 예장합동의 문제이다.


마가복음 12장의 주해 전문을 보고 싶다면,

심상법 교수의 개인홈페이지

http://www.ebible.or.kr./board/view.php?id=info4&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

를 방문하기 바란다.

한국 개신교 1,2위 두 교단의 극과 극을 달리는 행보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9. 19. 20:24


한국 개신교 1,2위 두 교단의 극과 극을 달리는 행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일명 예장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일명 예장통합)


두 교단은 원래는 하나의 교단이었으나 '1950년대에 있던 WCC 가입여부'로 갈라선 교단으로 개신교 신자와 그 규모로 1,2위를 다투는 곳이다. 두 교단의 최근 극과 극을 달리는 행보를 소개하고자 한다. 워낙 유명한 것들이라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예장합동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5405

2013년 7월 18일

예장합동은 교단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예배에 출석하지 않거나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는 교인은 권리가 자동 중지된다(3항)' 라는 부분을 삽입하고자 하여 논란을 빚었으며, 최소한의 조치라는 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절대적 권위로 믿고 따르는 성경에 의하면 '십일조'는 교회에선 존재자체가 없어진 것이므로 비성경적인 사이비의 주장이다.

예장합동은 그동안 이단판정을 자신들 마음대로 내리고 있는데, 스스로가 사이비(이단이 아님)의 짓을 하고 있다.



*예장통합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6856

2013년 9월 12일

예장통합은 정기총회에서 '세습방지법(담임목사직 대물림)'을 논의하였다.

장로들은 '헌법개정은 절차가 필요한데다 개정한지 얼마 안되었고, 개교회가 정해야할 문제' 라고 반대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목사들이 '무조건 찬성'을 외치면서 회의장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84%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으며, 헌법개정은 나중에 하도록 하기로 하고 세습방지를 즉각시행하기로 하였다.



->예장합동이 변명을 늘어놓기를, 총회에서 2/3 이상이 찬성해야 하고 노회에서 찬성해야 해서 교단헌법개정까지 총 2~3년이 걸린다며 안될 가능성도 있다고 구구절절 이야기 할때, 예장통합은 구체적 법안도 없고 헌법개정도 안했지만 통과했으니 즉각시행하고 교단헌법개정은 추후에 하기로 한다고 이야기 했다.


만약 당신이 개신교인이라면,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를 신뢰해야 할 것인가?

개신교의 성경 외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4. 24. 03:06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일단 이 단어는 어느 사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조어이기 때문에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예시를 통하여 뜻을 풀어보아야 한다.

-개신교의 성경 외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소천(召天) 
부를 소, 하늘 천

사용예시)"아무개 목사님이 x년x월x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

개신교에서 이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의도한 바는, 목사가 죽어서 하늘나라(천국)에 들어갔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사실 수 많은 상식있는 목회자들은 이 단어를 꾸준히 비판해왔다.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에,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사람은 죽어서 자신이 직접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신이 천국행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불러올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스스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 양 적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천을 사용한다고 치더라도 "소천되셨다" 라고 표현함이 옳다.

더러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라는 표현을 집어 넣기도 하는데, 이는 의미의 중복을 가져와 어법에 맞지 않다. 소천 자체에 이미 하나님이 불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므로 이는 '겹말(첩어)'에 해당한다. 겹말의 대표적 예시로는 알라신(뜻은 신신), 역전앞(뜻은 역앞앞) 등이 있다.

아마 이 단어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승천 (昇天) 1. 하늘에 오름.
소명 (召命) 2. <기독교>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 ‘부름’으로 순화.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두 단어를 비교하여 보면, 아마 승천과 소명을 즐겨쓰는 개신교의 특성상 두 단어를 조합했을 것이다. 어쨌든 잘못된 단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개신교의 성경 내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4. 24. 03:02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일단 이 단어는 어느 사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조어이기 때문에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예시를 통하여 뜻을 풀어보아야 한다.

-개신교의 성경 내부에서 잘못 사용되는 신조어 1

기묘자(奇妙者) : ‘기묘하다(생김새 따위가 이상하고 묘하다)’의 어근 + 사람 자(者)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용예시) 
이 단어는 개신교 성경에 2번 등장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중국어' 성경에 해당 부분은 기묘(奇妙)라 번역되었고 한국어 개신교 개역성경 번역자들이 그것을 베끼다 시피하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일단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절부터 보자.

사사기 13:18 개정판은 '사람 자(者)'를 기묘 뒤에 붙였다
(개역개정)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개역한글)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자기의 이름은 비밀(공동번역, 개신교 새번역), 그것은 신비한 것(가톨릭 성경),  It is beyond understanding(NIV), seeing it is wonderful(NASB,RV,ASV), seeing it is secret(KJV), It is a name of wonder(NJB).

문맥으로 보아 쓸데없는 이름 묻기를 하고 있으므로 천사는 대강 대답해주는 부분이다. 자신의 이름은 비밀이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이롭다 정도의 표현을 쓰고 있다. 느낌이 오는가? 기묘 혹은 기묘자와는 어감 차이가 크다. 더구나 천사의 이름 자체를 '기묘자'로 오인할 소지가 있다.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메시아 예언 구절이라고 부르는 구절이다.

이사야 9:6 개정판은 '띄어쓰기'를 고쳤다
(개역개정)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개역한글)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탁월한 경륜가(공동번역), 놀라우신 조언자(개신교 새번역), 놀라운 경륜가(가톨릭 성경), Wonderful Counselor(NIV,NASB,RV), Wonder-Counsellor(NJB), Wonderful, Counsellor(KJV,ASV).

이 사람은 놀랍고 경이로운 상담가 조언자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상하고 묘한 사람 정도의 뜻인 기묘자와는 거리가 있다. 개역성경의 모체인 1911구역성경 자체가 일부분은 중국어성경의 번역이었고 후에 선교사들의 영어성경을 번역한 것이며, 개역한글판은 흔히 RV나 ASV를 번역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 표현은 아마도 ASV를 따랐을 것인데, 그 이유는 기묘자와 모사(謀士, 꾀를 써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를 따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KJV과 ASV는 쉼표를 찍어 두 단어를 따로 쓰고 있는 반면, 다른 성경은 두 단어를 같이 쓰고 있다. 사실 모사 자체도 상담가,조언자,경륜가와는 거리가 멀다.

표현도, 만들어진 방식도, 번역도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조선의 개신교 초기 상황을 알 수 있는 글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4. 17. 00:54

1917년 발표된 소설가 이광수의 무정 中 일부


※참고 : 약 100년전 한국어인 까닭에 지금과 맞춤법과 표현이 일부 다르다. 소설에서 퍼온 것이므로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다. 단지 조선의 개신교 초기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어떠한지를 제시할 뿐. 1885년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후 약 30년 후에 발표된 소설이다.


79

김장로의 서재는 양식으로 되었다. 그가 일찍 미국 공사로 갔다 와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서양식 생활을 하려 한다.

방바닥에는 붉은 모란 무늬 있는 모전을 깔고 사벽에는 화액(畵額)에 넣은 그림을 걸었다. 그림은 대개 종교화다. 북편 벽으로 제일 큰 화액에는 겟세마네에는 기도하는 예수의 화상이 있고 두어 자 동쪽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화액에 구유에 누인 예수를 그린 것이요, 서편 벽에는 자기의 반신상이 걸렸다. 다른 나라 신사 같으면, 종교화 밖에도 한두 장 세계 명화를 걸었으련마는, 김장로는 아직 미술의 취미가 없고 또 가치도 모른다. 그는 그림이라 하면 종교에 관한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기타에는 옛날 산수 풍경이며 지란매죽 같은 그림은 얼마큼 귀하에 여기되, 이러한 그림은 서양식으로 차려 놓은 방에는 부적당한 줄로 안다. 그러고 서양식 인물화라든지 그중에도 미인화, 나체화(裸體畵) 같은 것은 별로 보지도 못하였거니와 보려고도 아니하고 본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미술이라는 말도 잘 알지 못하거니와, 대체 그림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한다. 더구나 조각(彫刻) 같은 것은 아마도 그의 오십 년 생활에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종교와 같이 귀중히 여기는 예술(藝術)도 그의 눈에는 거의 한푼 어치 가치도 아니 보일 것이다. 서양 사람의 생각으로 그를 비평할진대 '예술을 모르고 어떻게 문명 인사(文明人士)가 되나' 하고 의심할 것이다. 실로 문명 인사치고 예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장로는 방을 서양식으로 꾸밀 뿐더러 옷도 양복을 많이 입고, 잘 때에도 서양식 침상에서 잔다. 그는 서양, 그 중에도 미국을 존경한다. 그래서 모든 것에 서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과연 이십여 년 서양을 본받았다. 그가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에는 아마 서양을 본받기 위함인지 모른다. 그리하고 그는 자기는 서양을 잘 알고 잘 본받은 줄로 생각한다. 더구나 자기가 외교관이 되어 (미국 서울) 워싱턴에 주재하였으므로 서양 사정은 자기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가 없거니 한다. 그러므로 서양에 관하여서는 더 들을 필요도 없고 더 배울 필요는 무론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문명 인사로 자임한다. 교회 안에서와 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나 다만 그렇게 인정하지 아니하는 한 방면이 있다. 그것은 서양 선교사들이라. 선교사들은 김장로가 서양 문명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을 안다. 김장로는 과학(科學)을 모르고, 철학(哲學)과 예술(藝術)과 경제(經濟)와 산업(産業)을 모르는 줄을 안다. 그가 종교를 아노라 하건마는 그는 조선식 예수교의 신앙을 알 따름이요, 예수교의 진수(眞髓)가 무엇이며, 예수교와 인류와의 관계 또는 예수와 조선 사람과의 관계는 무론 생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문명이라 하면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 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 서양의 문명을 이해(理解)한다 함은, 즉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한다는 뜻이니, 김장로는 무엇으로 서양을 알았노라 하는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함을 안다. 그러므로 그네는 김장로를 서양을 흉내내는 사람이라 한다. 이는 결코 김장로를 비방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참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의 문명의 내용은 모르면서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 집을 짓고, 서양식 풍속을 따름을 흉내가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리요. 다만 용서할 점은 김장로는 결코 경박하여, 또는 일정한 주견이 없어서, 또 다만 허영심으로 서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양이 우리보다 우승함과, 따라서 우리도 불가불 서양을 본받아야 할 줄을 믿음― 깨달음이 아니요― 이니 무식하여 그러는 것을 우리는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는 과연 무식하다. 그가 들으면 성도 내려니와 그는 무식하다. 그는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깨달을 줄로 안다. 하기는 그에게는 그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나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알 수가 있을까. 십 년 이십 년 책을 보고, 선생께 듣고, 제가 생각하여도 특별히 재주가 있고, 부지런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야 처음 보는 남의 문명을 깨달을 동 말 동하거든, 김장로가 아무리 천질이 명민하다 한들 책 한 권 아니 보고 무슨 재주에 복잡한 신문명의 참뜻을 깨달으리요.


그러나 김장로는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지 자기는 잘 모르면서도 서양 사람들이 다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내므로 자녀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안다. 안다는 것보다 믿는다 함이 적당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는 마침내 문명을 알게 될 것이라. 이리하여 조선도 점점 신문명을 완전히 소화(消化)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와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녀들은 잘 알고 하는 것이언마는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리하여 소위 신구 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 들어올 때에 으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마는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그러나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이 자기 아는 이상 알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신구 사상 충돌의 비극은 그 책임이 흔히 낡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기독교(그리스도교)에서 술,담배를 해도 되는가? ver 2.5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4. 8. 04:39

그리스도교에서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되는지에 관련된 것에 있어 논란종결을 짓고자 하는데, 사실 이 글은 오직 '개신교'에 한정된 글이다. 왜냐하면 천주교 등 다른 어느 그리스도교에서도 술, 담배를 금하지 않을 뿐더러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더구나 이 논쟁은 낡은 논쟁이며, 대한민국에서만 논쟁거리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라는 제목의 앞글을 읽고 오면 더 좋을 것이다. 성경은 개신교 새번역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교(기독교, 예수교)는 예수와 야훼(여호와)의 관점이 제일 중요하다. 사도가 아니라. 


<술>

-야훼(여호와)


하나님이 의롭다고 평가한 사람, 직접 약속까지 맺을 사람이 술을 마신다

1.(창세기 9:21)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 평한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포도'즙'은 마신다고 절대로 취하지 못한다.

노아에 대한 평가-(창세기 6:9)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2.(창세기 27:25)이삭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네가 사냥하여 온 것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서, 너에게 마음껏 복을 빌어 주겠다." 야곱이 이삭에게 그 요리한 것을 가져다가 주니, 이삭이 그것을 먹었다. 야곱이 또 포도주를 가져다가 따르니, 이삭이 그것을 마셨다.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서 태어난 아들이자, 이삭의 후손을 통해 12지파도 나오고 약속도 맺겠다고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 포도주를 마셨다.

이삭은 하나님이 직접 태어나게 한 것-(창세기 21:1~7 본문생략)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직접 약속한 이삭을 얻었다. 하나님이 직접 이삭을 통해서 12지파도 나오고 계약도 맺겠다(그리스도교 입장에서 구약)고 말한다.


포도주는 하나님의 축복

1.(창세기 27:28)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너에게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이다. 포도주가 넉넉하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준다고 한다. 포도주를 싫어한다면 축복할리가 있는가?


2.(신명기 11:14)

주님께서 당신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 따라 내려 주셔서, 당신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철 따라 비를 내려줘서 포도주를 거두게 한다고 한다. 하나님이 술을 싫어했다면 포도주를 왜 만들도록 하는 것인가?


3.(출애굽기 22:29)너희는 곡식을 거두거나 포도주를 빚거나 올리브 기름을 짠 다음에는, 거기에서 얼마를 나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 너희는 맏아들들을 나에게 바쳐야 한다. 

->포도주를 빚은 후에는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제물로 바치고 난 나머지는? (자신들이 마시는 것이다)



술에 대한 금지구절인가?

1.(레위기 10:9)"너의 아들들이 너와 함께 회막으로 들어올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라. 어기면 죽는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 

->하나님이 직접 말하길 술 마시고 회막으로 들어오면 죽는다고 대단히 위협적으로 한 말이다. 이는 레위지파 제사장에게 한 말이지, 이스라엘 국민에게 말한게 아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에게도 '회막에 들어올 때' 라는 조건을 달았다. 다른 조건일 때는? (마셔도 된다). 제사장이 술에 취해 제사를 대충 하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임은 상식적으로 알고있다. 지금 레위지파 제사장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 유대교에도 레위지파가 없어서 이 규례를 지킬 사람이 없다.


2.(민수기 6:3)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한다. 포도주로 만든 시큼한 술이나 독한 술로 만든 시큼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포도즙도 마시지 못한다. 날 것이든 마른 것이든, 포도도 먹어서는 안 된다. 

->포도주, 포도주로 만든 술, 독한 술,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 까지 일일이 구분해 가면서 마시거나 먹으면 안된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문자주의)에 의하면 술은 물론이거니와 '포도'도 먹어선 안된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왜 이런 구절은 입 다무는가? 아마 불리해서 일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나실인'에게 하는 말이며,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봉헌하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성경 속 유명한 나실인은 구약성경의 삼손과 사무엘, 신약성경의 세례자 요한이다.


삼손은 태어나기도 전 부터 하나님이 나실인으로 쓰려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부터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사사기 13:4) 그러므로 이제부터 조심하여,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라. 부정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바리새인의 표현을 인용한다-(누가복음 7:33)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앞선 -삼손, 사무엘, 세례자 요한- 딱 3명 만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약속으로 평생 하나님에게 봉헌된 나실인이었으며, 3명을 제외한 나머지 나실인은 일시적 나실인으로 서원기간 동안만 3가지 금지규례가 있었지 기간이 끝나면 술을 마셔도 되었다.


나실인 기간이 끝나면 술을 마셔도 된다-(민 6:20) 그것들을 흔들어서, 그것을 나 주에게 드리는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것들은, 흔들어 바친 가슴 고기와 높이 들어올려 바친 넓적다리 고기와 함께, 제사장이 받을 거룩한 몫이다. 이런 절차가 다 끝나면, 그 나실 사람은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


그리스도교인은 평생 나실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부정 구절이 되지 못한다.



3.(신명기 29:5~6)나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였다. 그래서 너희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너희 발에 신은 신이 닳지 않았다. 너희는 빵도 먹지 못했고, 포도주나 독한 술도 마시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서, 내가 바로 주 너희의 하나님임을, 너희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이다. 너희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후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으로 간 다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어떻게 해준 다는 것인가? (먹게 해주겠다)


4.(신명기 32: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으로 담근 독한 술이요, 독사의 독이 그득한 술이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인가? 우상숭배자들이다.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다. 그들의 포도주는 독이 가득한 것이면, 우리들(이스라엘 국민)의 것은? (독이 없는 좋은 것).



술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 평가

1.(신명기 14:25~26)당신들은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십시오.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2차 십일조이다('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글 참조). 포도주건 독주건 마음에 드는거 아무거나 사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같이 먹으라고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은 술을 권하고 있다.


2.(민수기 28:7~8)이것과 함께 바칠 부어 드리는 제물은, 숫양 한 마리마다 사분의 일 힌으로 한다. 너는 거룩한 곳에서 독한 술을 나 주에게 부어 바쳐라. 저녁에 둘째 숫양을 바칠 때에도, 아침에 한 것처럼 그렇게 곡식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쳐라. 이것은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사이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제사에 독한 술을 부어 바치라고 한다. 독한 술을 싫어했으면 왜 부어 바치라고 하겠는가?


전체적으로 종합해볼때 야훼는 구약의 제사에 포도주를 사용하도록 했고, 성서에 포도주는 야훼의 축복으로 비추어졌다. 고로 야훼(여호와)는 술에 대해 좋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유대교의 푸림(Purim, 부림)절 축제에서는 필름이 끊길때까지(정확하게는 모르드카이(Mordecai, 모르드개)의 축복과 하만(Haman)의 저주를 구별하지 못할정도까지) 술을 마시라고 가르치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예수

예수는 포도주를 마시고 만들기 까지 했다(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 잔치).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왜 당신과 제자들은 (음식)먹고 (술)마시느냐고 책망했다(공관복음서 3개 모두).

또 포도주는 자신의 피라며 모든 제자들에게 마시도록 했다(공관복음서 3개 모두, 성찬).

즐거울때 마신건 아니지만, 예수는 죽기전 신 포도주를 마셨다(4복음서 모두).


또 예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가르쳤다.(마태15:11, 마가7:15~16)


대표적으로 예수의 행동 2가지를 살펴보자.


예수의 포도주에 대한 행동

1.(누가복음 7:34)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바리새인이 예수를 비난하는 구절이다(결국 예수가 읊어주긴 했지만).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고 비난한다. 예수는 포도주를 마셨다. 이를 예수가 직접 바리새인의 비난을 인용하며 인정했다.


2.(요한복음 2:1~12 '가나의 혼인잔치' 본문생략)

->예수가 직접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 더러 이 구절을 포도'즙'이라 주장하려 하나, 이는 끝까지 읽지 않은 과오를 범한 실수이다. 10절에서 '손님들이 취한 뒤에'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지금 잔칫집 손님들은 포도주에 취해있다. 그런데 맛 좋은 포도주가 나오자 놀라며 반문하고 있는 중이다. 포도'즙'은 절대로 취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종합해볼때 예수는 술을 즐겼으며, 좋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


*진짜 사도 바울의 편지(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진짜 사도 바울의 편지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음식은 야훼에게 가까이 가는 것과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으며(8절), 믿음이 약한 새신자가 내가 먹는 고기(주석-유대교는 특히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됨. 어떤 고기든 도축 과정도 신경써야함)때문에 흔들린다면 (사실은 먹어도 상관 없지만) 차라리 새신자를 위해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또다른 진짜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로마신자들에게 쓴 편지라는 편지 이름대로 로마의 술 문화처럼 취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하루에 최소 0.5L 씩 포도주를 마셨고 종교행사에서는 필름이 끊길정도로 폭음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이 문자그대로 몇잔 마셨을때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금하라는 것이 아니고 폭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


-> 사도 바울도 음식과 신은 상관이 없다고 느꼈고, 로마의 폭음문화를 경고했지 마시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결국 야훼(여호와),예수,바울의 의견을 살펴볼때 그리스도교에서는 술을 마셔도 되며, 그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중에서 술을 금지하는 것은 이슬람교뿐이다.



-사도 바울 위서


*사도 바울 위서(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후서,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히브리서(전승))


디모데전서에는 술을 마시라와, 마시지 마라가 모순되게 등장한다. 어떤 해석을 덧붙이던간에 그것은 사도 바울 위작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사도의 권한조차 느껴서는 안되는 책이다. 더구나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감독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이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편지의 목적부터 잊은 채 헛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라는 구절을 대어 반박할지 모르지만, 위작 중 골로새서 2:16은 먹거나 마시는 것으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인다.


위작에는 모순된 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다 다른 사람들이 위작을 썼기 때문이다. 결국 진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담배>


담배는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500년대에나 조금 전해지고 1800년대 후반쯤에 와서야 활성화 되었다고 할까.


담배는 오로지 추측으로만 알 수 있다.


일단 예수의 구원이 고작 술 마시고 담배 피는거 여부로 결정된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자신들의 신인 예수를 쫌팽이로 만들고 있다.


술과 담배 금지는 영국 청교도 때문이다. 청교도가 영국에서 핍박받으니 미국으로 건너와서 미국을 세웠고, 그 청교도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생활을 했던 미국 개신교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자신들의 가르침을 똑같이 한국 사람한테 적용하려고 했으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정작 미국에서는 망했는데 한국에서는 흥했다.


한국 개신교는 술,담배 금지를 거의 11,12 계명으로 만들어 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예수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말하는 바이다.


천주교는 술,담배를 금하지 않으며, 개신교를 만든 루터와 칼뱅 역시 술을 즐겼다.


아울러 개신교가 최고 지성으로 떠 받드는 근현대 인물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를 즐겼다.


*찰스 스펄전 목사 - 설교의 황태자. 그의 설교는 지금까지도 설교학의 중심이다. 목사들의 설교 중에 스펄전의 설교를 베낀게 아주 많다. 어찌나 애연가 였던지 학생들과의 담배 농담도 많고, 심지어 당시에 스펄전의 유명세를 이용한 담배 광고 제목이 '스펄전의 담배' 였다.


*칼 바르트 - 개혁교회(장로회) 신정통주의 조직신학자. 한국에도 '바르트학회' 가 있을 정도. 지금 장로회에선 그의 로마서 주석으로 로마서 공부를 한다. 파이프 담배 애연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 감리교 설립자. 술을 즐겼다.


*C.S.루이스 -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기독교 변증가. 반지의 제왕을 지은 J.R.R.톨킨의 친구. 톨킨이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데리고 왔다. 담배와 술은 10대때 부터 시작해 죽을 때 까지 했다.


*디트리히 본 회퍼 - 루터회 목사. 예언자적 행동으로 반나치운동을 하다 나치에 의해 사형. 담배를 즐겼음.


또 그리스도교인이 술을 마시면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려면,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봐야하는데,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 러시아의 보드카, 영국의 위스키 등 오히려 자신들이 술 만드는데에 앞장 서고 있다.


예수는 아마 담배를 피우며 제자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다음 설교장소는 어디로 할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3. 31. 04:24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일부러 하나님이라 적었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 "성경은 모든 구절의 일점일획이 다 하느님의 말씀이에요" 라는 멍청한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누구가, 예언자 누구가, 예수님이, 주님이 등으로 누가 말하는지를 분명히 하며 말하기 때문이며 그 목적을 안다. 반면에 개신교는 사도의 말이건, 예수의 말이건, 예언자의 말이건, 심지어는 악인의 말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 목회자부터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그에 교육받은 신자들 조차도 해당 성경의 작성목적은 잊은채 모든 구절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무신론/불가지론 등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일단 신이 없으므로 성경 전체는 모두 고대 사람들이 작성한 문서들을 집대성한 것일 뿐이며, 일부는 역사적 사실이거나 또 일부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람의 말을 적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저자의 상상일 뿐이다. 꼭 어느 집단의 입장을 붙이지 않더라도 이는 사실이다. 허나 이 주장은 근본주의 개신교의 잘못된 통념을 바로 잡지는 못한다.

'성경은 근본주의 개신교가 생각하는 대로 일점 일획도 전부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다시 되짚어 보게 된 이유는 어느 음식점에서 본 것 때문이다. 그것은 맨 마지막에 다루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근거를 되짚어 본다.

1)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감동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등장하는 단골 구절이 있다.

디모데후서 3:16(새번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성경'은 '구약' 이지 '신약'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성경하니까 아주 당연스럽게 신구약성경을 이야기하는 줄 알지만,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다. 신약성경 목록은 4세기까지 박터지게 싸우다가 성립되었으므로 절대 신약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령 신약을 의미했다 치더라도 -백번양보해도 절대 그럴일은 없지만- 그 목록도 없고 신약이 완성되지도 않았을 시절이다.

더구나 여기서 말하는 성경, 즉 구약도 이 차명편지가 쓰여질 1세기 말 당시에 뭐가 정경인지 목록을 제정하던 때였다. 한편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기 얼마전에 쓴 것이므로 60년대 중반인데, 구약목록이 정립된 것은 AD 90년 얌니아 회의이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여기서 성경은 뭘 의미하는 지도 모르는 단어인데다, 심지어 자신들이 보는 구약도 여기서 말하는 성경이 아니다.


2)하나님의 말씀에는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신의 말에 오류가 있고 모순이 있고, 앞뒤 말이 다르면 그게 신인가? 당연히 신이라면 일점일획의 오류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말에는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신의 말이 '원본'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본'은 히브리어이며 히브리어 '원본' 성경이 아니면 일점일획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베끼는 와중에 글자 하나라도 잘못 표기 했다면 이미 오류가 생긴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신은 히브리어로만 말을 했을 것이며(그게 기록 언어니까), 그리스어로는 말한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신)이라 말한 적이 없으며, 신이라 하더라도 그는 아람어를 사용했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점일획설을 들고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영어권에서는 KJV를, 한국어권에서는 개역한글판이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고 믿는다.

심지어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조차도 신의 말씀이 아니므로 부정해야될 판에,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소리는 그냥 헛소리다.


더구나,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신)의 말은 다 표기가 되어있다.
"나 주의 말이다" (새번역)
"야훼가 말한다"  (공동번역)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개역개정)

따라서 이 말만이 신의 말이다. 신이 말할때는 해당 구절로 운을 떼고, 말이 끝나면 닫는다.


흔히 사용하는 잘못된 예시)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어느 음식점에 걸어둔 성경구절이다. 우리가 앞서 말한바 대로 이것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욥기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누가 들어도 듣기 좋은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달아놓았을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마치 이 구절을 "지금 사업장은 작지만 나중엔 커질 것이다"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선 욥기 전체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욥은 의로운 사람이나 하나님과 사탄이 얼마나 의인인지 시험삼아 보고 있는 대상으로,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리게 만든 후 세 친구(엘리바스,빌닷,소발)와의 대화형식으로 되어있다. 그 후 또 다른 사람(엘리후)의 말이 있고 결국 하나님은 욥을 의인으로 여기고 복을 준다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첫째, 이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이면 써먹어도 괜찮겠지만, 사람의 말이다.

둘째,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은 욥이 진정한 의인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며 세 친구는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도 아닌 사람의 말을 갖다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마치,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누가복음4:7) 라는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면 모든걸 준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사실 이 구절은 사탄이 예수에게 한 말이다. 의인이 아닌 사람 또는 악인의 말을 갖다가 쓰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사탄의 말은 갖다 쓰지 못하면서, 의롭지 못한 사람의 말은 갖다 써도 괜찮은가?

셋째, 앞뒤 문맥과 수아 사람 빌닷의 특성상 아무데나 갖다 박을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욥이 고난을 받자, 빌닷은 "이게 다 너의 죄 탓이며, 벌은 악인만 받는 것" 이라며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 주실테니까, 아무 것도 없는 지금은 미약하지만(보잘것 없지만) 나중에는 창대해질거야(크게 될 거야)" 라고 말하는 구절이다. 사업장 번창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시를 하나 살펴보며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인용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따라서 개신교인들은 앞뒤 문맥,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한 말인지도 모른채 다 갖다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성경은 구절과 단어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국 개신교에서 사이비가 정말 많이 나왔다. 한 구절, 단어 떼어서 생각하는 것으로는 단연 최고이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이런 방식으로 6.25 전쟁 이후만 쳐도 수십명의 사이비교주들이 등장했다. 정통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매번 이단판정 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잘못된 태도 탓에 벌어진 일이므로 그들은 할 말이 없다. 결국 개신교계 사이비종교는 현재 개신교의 각성으로 해치워야할 사회악이지, 일방적으로 이단 판정하면서 "저기 교회 가지마세요" 주장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WCC 반대를 외치는 한국 개신교의 실체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3. 27. 21:16

WCC 반대를 외치는 한국 개신교의 실체


아주 간단히 개신교들이 입다물고 있는 사실까지 요약해서 설명하겠다. 무신론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썼다.


WCC 반대를 외치는 곳의 주축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고, 그 주축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신학교는 총신대학교) 인데 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신학교는 장신대학교)과 함께 대한민국 1,2 위를 다투는 교파이다.


WCC 찬성을 외치는 곳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이고, 그 주축은 예장통합이다. (※참고 : WCC에 가입되어있는 건 NCCK이다)


여기서 문제는 한기총은 2012년 부터 교단과 가입 단체가 절반 이상 날아가 토막나 버린 단체로 '지고 있는 별'이고, NCCK 가입 교단이자 한기총을 탈퇴한 예장통합이 주축이 되어 한기총 탈퇴 교단과 단체가 새로이 형성한 한국교회연합(CCIK)은 '뜨고 있는 별'이다.


위기를 느낀 예장합동이 결국 발악을 하면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다.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싸움은 어디서 시작하냐면,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반으로 갈라진 것에 있다. 갈라진 이유는 WCC 가입여부 였고 이때부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에 그 따위 문제는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몇 십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반대가 개신교 신자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다가, 2012년 한국교회연합(CCIK)이 결성되면서 위기를 느낀 예장합동이 결국 난리를 치고 있는 꼴이다.


한편 (예장합동이 주축이된) 한기총의 WCC 반대의 주요이유가 종교다원주의로 결국 (그들 입장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도 구원을 받는 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지겨운 떡밥인 우상숭배 비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


역사는 장로회 선교사의 입국 부터 시작한다. 1885년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외국인이 모여 만든 단체에 조선인이 끼고 조선인이 다수에 주축이 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가 결성되었다. 첫번째 갈라짐은 신사참배(결국 그들 입장에서 우상숭배)를 하느냐 마느냐 였고, 하지 말자던 소수파는 고려신학교(고신)로 당시 갈라져 나갔다가 전쟁중에 다시 합쳤다. 결국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우상숭배를 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 터무니 없는 주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러고 두번째 갈라짐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신학교는 한신대학교)으로 이는 신학적 차이 때문이다. 세번째 갈라짐이 바로 WCC 가입 여부 였던 것이고, 그 이후로는 자신들 마음에 안들면 갈라지는 무수한 갈라짐이 있었다.


한국 개신교는 일제에 빌 붙다가 미국에 빌 붙고, 독재에 빌 붙으며 성장해온 역사이다. 특히 현재 남은 한기총계 교회들이 그렇다. 해방 후 진정한 NCCK가 시작되었고 처음엔 이승만과 박정희를 지지하는 등 다 잘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70년대 부터 그래도 그들은 국내에선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힘썼고, 여러 교단과의 대화에 힘쓰고 있다. 


NCCK에선 장로회,감리회,순복음,성공회,루터회,정교회 등의 다양한 교회가 있는 반면 한기총은 거의가 장로회(합동과 합동에서 분파된) 뿐이다.


WCC반대를 외치는 입장은 우리만 진리고 니들 다 이단이라고 외치는 꼴로 그들이 규정한 이단이라는 곳이 정통을 비난하는 방식과 똑같은 것일 뿐이다.


세계 장로회 전체의 역사를 보아도 그들은 아류일 뿐이며, 한국 장로회는 더 아류이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수 십년 전부터 진행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통에 그들 혼자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는 꼴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십일조의 허상과 진실) ver 3.5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3. 27. 21:06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사용한 성경은 개신교 새번역판.


'십일조를 내야하는가'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고 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건대 십일조는 내지 않아도 된다.


일단 십일조는 원래 구약의 제도이고, 타락한 중세 교회가 부활시켰던 것이고, 그것을 폐지한지 오래며, 현재는 구약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요구하는 여호와의증인 마저 없애버렸다. 남아있는 곳은 미국의 소수 개신교 교단(주로 오순절)과 대한민국의 다수 개신교 교단(장로회, 오순절 등) 뿐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1)낼 곳도 받을 사람도 없다


십일조는 원래 세금으로 국가에 바치는 것이었으며 그것의 사용처는 레위지파 였다. 13번째 레위지파는 성직자 그룹으로 다른 12지파와 달리 땅도 받지 못하고 일도 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성직 업무를 담당하는 대신에 12지파에서 1/10을 떼어 그들에게 생활비를 댔던 것이다(1차 십일조). 또 바치는 사람을 위해 따로 떼어놓아 바치는 사람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었으며(2차 십일조), 또 그것은 과부와 고아 같은 소외된 계층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했던 제도이다(3차 십일조). 이는 구약의 율법이었다.


따라서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인에 의해 무너져 이스라엘-유다 국가 자체가 지구상에서 없어진 후 유다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약 1900년 후에 전쟁으로 땅을 빼앗아 현대 이스라엘을 건국했지만 그들에겐 성전이 없고 레위지파가 없다. 현대 유다교는 1세기 중반의 성전 유다교가 아니라 1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랍비 유다교다. 따라서 내야될 장소도, 내야될 의무도, 받을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십일조는 개신교에서 걷고 있는데 내는 곳은 교회(예배당)이다. 하지만 내야될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며, 교회(예배당)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더구나 세금은 국가에 내는 것이지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십일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신정국가 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신정국가도 아니고, 교회는 국가가 아니다. 더러 개신교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 부르며, 교회 건물을 종종 성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설(특별한 성직계급은 없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이자 성직자이며, 유일한 최고의 대제사장은 예수 뿐이다)을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설립된 것이므로 목사는 레위지파 처럼 특별한 성직자가 아니다. 아울러 장로회의 경우 목사의 직위는 평신도인 장로 중 '가르치는 장로' 이므로 평신도 이다. 


둘째, 성전이려면 기본적으로 제사가 있거나 성전에서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만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예배당 자체도 비성경적인 것으로 초대교회는 집에서 모였다. 더구나 개신교의 예배 및 기도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굳이 예배당이라는게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라는 표현 역시 잘못된 것인데,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를 경우 예수의 구속사역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므로 이단보다 훨씬 심한 표현이다. 아예 신약 자체를 폐기하겠다는 표현이기 때문.


셋째, 세금은 국가에 내는 것이며 교회는 국가가 아니다. 십일조를 거두었던 고대 이스라엘-유다는 신정국가 였다. 그러기에 율법이 곧 법이어서 국가에서 십일조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십일조를 거두었던 서양 그리스도교들은 전부 폐지한지 오래되었다.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이라는 말을 한국 개신교에서는 입에 달고 살지만, 원조인 서양은 비성경적이라며 폐지한 것에 주목하라. 십일조는 아니나 교회세를 걷는 외국의 경우 1~2%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여 교회에 주는 것이지, 교회가 직접 걷는 것이 아니다.



2)내야 한다는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거나 사기를 치는 구절들이다


  A)예수가 십일조를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에 십일조는 총 3회 등장한다(누가18:12, 누가11:42=마태23:23). 하지만 뒤의 두개는 말한 배경은 다르나 내용이 같은 병행구절이므로 언급은 2개이다. 2개 중에 1개는 예수의 말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자신이 율법을 이렇게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도중에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이다.


(누가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십일조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예수의 언급인 누가11:42=마태23:23 를 살펴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쉽게 말해, 예수 曰 "이 쓰레기들은 율법 지키기는 칼 같이 지키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쏙 빼 먹는다! 십일조를 하면서 정의,자비,신의 같은 의미를 되새기랬지 언제 그것만 지키라고 했느냐!" 라고 마태복음 23장 1~36절 까지 길게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것 중 일부이다.


이것을 무작정 십일조 하라는 구절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구약시대'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레위지파도 있었으므로, 낼 장소와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죽고 '신약시대'가 시작된지 40년 후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없어져 버렸으므로 예수 당시에는 내는게 맞았고, 지금은 낼 곳이 영원히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어야 신약이 시작되는 것이다! 누가 22:20-'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율법교사와 바리새인은 예수가 가장 많이 비난하는 집단이다. 예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그 따위 것 다 필요없고 마음가짐이나 똑바로 하고 율법의 본래 의미나 알고 살라고 설교했는데, 목사들이 뭔데 율법을 부활해 철저히 준수 할 것을 요구하나? 더구나 율법을 전부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 '만' 부활하나?


더구나 예수가 언급한 십일조의 내용물은 박하,회향,근채로 모두 '땅에서 난 산물'이며(구약에서 '땅에서 난 산물'의 1/10을 바치라고 했다) 돈이 아니다. 따라서 돈을 바치는 것은 십일조가 아니다. 더구나 박하,회향,근채는 향신료로써 원래 십일조의 대상이 아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은 이런 잡 농산물에도 철저히 십일조를 한다며 자랑을 했기에 예수가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은 것이다.



  B)헌금을 마치 없는 상황에서도 전부를 내야하는 정도의 것으로 생각한다
(누가복음 21:1~4=마가복음12:41~4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예수가 '액수나 비율이 중요한게 아닌, 헌금을 내는 마음가짐이 올바른 과부'를 보고 칭찬한 것 처럼 보인다. 이는 상당수 성경주석이 그렇게 적고 있는 것에도 한 몫 한다. 그러니 신자들은 자연스레 "xxx 목사님이 주석 단 거니까"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유명한 외국의 성경주석들도 그렇게 적고 있다. 

이 구절의 최대 실수는 '문맥을 무시하고 읽었을 때'에 발생한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말한 이 성전은 '제2성전(헤로데 대왕 성전)' 이다.

마가복음에서는 11:27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와 13:1 에서야 성전에서 나간다.
누가복음에서는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정확하게 써 있지는 않다.
20:1부터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어느날 벌어진 설교라고 적고 있고 21:37에서 낮에는 성전에서, 밤에는 올리브 산에서 지냈다고 적혀있다.

어쨌든 설교의 배경은 '성전'이다.
문맥 파악의 기본부터 하기 위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과부의 헌금' 사건 바로 전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다

45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의 구절을 잘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부의 헌금 사건은 율법학자를 비난하며 예시를 든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의 예시가 곧 생활비 전부를 넣게한 사건인 것이다.

2 렙돈 = 1 고드란트 = 1/64 데나리온
1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임금 (마태 20:2) 이므로 일당 5만원이라 치고 계산하면 약 781원 정도이다.

쉽게 생각해, 500원 2개 헌금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율법교사들은 이런것마저도 율법 운운하며 성전에 들어왔으니 예물을 드리도록 해 가난한 과부의 돈을 꿀꺽 한 것이다.

이야기 구성을 다시 해보자.
예수 曰 "율법학자들의 율법강조를 조심해라. 율법학자들은 예복 입기, 장터에서 인사받기, 회당의 높은 자리 앉기, 잔치에서 윗자리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꿀꺽하면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율법학자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말하는 와중에 성전에 있는 헌금함을 보았는데 부자들이 100만원 수표 내는 것과, 과부가 1000원 내는 것을 보았다. 이 헌금함은 성전에 출입했으니까 돈 내라는 전형적인 율법적인 장치였다) "부자들은 돈이 넉넉한 와중에 100만원 냈지만, 과부는 당장 돈이 없는데도 1000원을 내었다. (액수는 제쳐두고)저 과부가 제일 많이 넣었다" (부자는 100만원 내도 생활에 지장받지 않지만, 과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때문에 생활비 전부를 예물로 냈는데, 과부는 혜택을 받아야 함에도 율법을 운운하며 넣게할 정도로 더러운 놈들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자기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데도 전부를 넣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혜택을 받아야할 과부들이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함에 대한 예수의 분노이다. 과부가 왜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는 아래(※십일조의 진실)에 적혀 있으니 참고하라.

더구나, 만약 이 부분을 예수가 과부를 칭찬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 흐름을 깬다. 마가복음 11장~13장과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간 후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았고, 그에 대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권한에 대해 문제 삼았으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비유로 이야기 하자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며, 바리새인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시험을 했고, 사두개인들과는 부활 논쟁을 벌였으며, 논쟁을 본 율법학자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고,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였으며(이 와중에 과부의 헌금이 나온다), 성전을 나가는데 성전이 전부 무너질 것이라 말하고 종말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가르친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3장의 내용까지 살펴보았다. 요약문만 읽어봐도 예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있으며 흥분해있다. 예수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고 얼굴은 찌푸려져 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하고 난리통이다. 시골촌놈을 어떻게 잡아볼까, 죽여볼까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까지 나선다. 성전에서 들어와서 나가는 순간까지도 예수와 대제사장과 율법교사들은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화가 나있다. 이 와중에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두 절도 채 안되는 부분인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이상하다. 허나 많은 주석서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대표격으로 내가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정교수 심상법(신약학, 성서해석학) 교수의 해석을 비판한 것이 있으니 자세히 보려면 링크를 따라가기 바란다.


  C)십일조하면 복 받는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필수로 알아야 할 사항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것을' '나의 것을' 같은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 없다.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님을' '나를'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의 것을'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표준새번역(1993)과 그의 개정판인 새번역(2001)도 위와 같이 번역하고 있는데 헛소리 번역이다. 오역일 뿐만아니라, 내 생각에는 일부러 이용해 먹으려고 이렇게 번역한 듯 싶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개신교 성경 전부 ('대한성서공회' 개역한글,개역개정,(표준)새번역, '생명의 말씀사' 현대인의성경,'두란노' 우리말성경, '아가페' 쉬운성경) 일부러 오역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동번역성서(1977)은 가톨릭의 눈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나를' 이라고 옳게 번역했으나, 8절에서 '소출에서 열의 하나(십일조)' 만 언급하고 '예물(헌물)'을 빼먹는 실수를 했다.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개정되지 않았다.


현재 이 단락의 제일 옳은 한글번역은 가톨릭 성경(2005)이다.

(※참고로 대표적인 영미권성경 NIV, KJV, NASB, NJB, RSV 모두 옳은 번역을 했다.)


따라서 이 부분만은 가톨릭 성경을 사용할 것이다.


(가톨릭 성경 말라키 3장)

6 나 주님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7 너희는 조상 때부터 나의 규정에서 벗어나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하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한다.

8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를 약탈하고 있으니 저주를 받으리라.

10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2 그러면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바로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말라기 3장의 해석은 너무나 중요한데,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안 내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사람"이라 가르치면서 신자들의 마음에 죄를 심어줌에 있다. 십일조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물고 들이미는 구절이 이 구절이기 때문에 가장 잘 이해해야 한다.


~의 것 이라고 해석하는 목사나 신학자가 있다면 당당하게 배틀을 신청하라. 가톨릭의 성경을 보는 개신교 목회자는 거의 없을테니, 영미권 개신교 성경 NIV나 KJV만 들이밀어도 할말이 없다. 문장도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해석이 가능하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된 NIV 성경(개신교)으로 해당 구절을 확인해보면,

"Will a man rob God? Yet you rob me. "But you ask, 'How do we rob you?' "In tithes and offerings.

You are under a curse--the whole nation of you--because you are robbing me.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신을 강도질 할 수 있느냐? 그러나 너는 나를 강도질 했다. "하지만 너는 '우리가 당신을 강도질 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 "십일조와 바치는 예물이다"

너는 저주 아래 있을 것이다--너희 나라 모두--왜냐하면 너는 나를 강도질 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3장의 이 단락을 쉽게 말함과 동시에 당시의 이 말이 나온 시대배경과 말라기 전체의 내용을 괄호속에 집어 넣어 함께 설명하겠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4장 밖에 안되는 말라기를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말라기 3장 요약

야훼 曰 "내 백성아 제발 내게 다시 돌아와라"

이스라엘 曰 "(아니 이미 유배 갔다가 돌아와서 성전도 지어 당신 섬기고 있구만)돌아가려면 뭘 해야하나요? (유배 갔다왔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나라가 휘청거리니까 이런 힘든 상황 벗어나게 복이나 내려줘요)"

야훼 曰 "니들은 (제일 쉬운 율법인)십일조 부터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복을 달라고 하냐! (양심도 없는 것들아!) 땅의 소산물에 십일조하면 내가 그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가 나온 땅을 비옥하게 해줘서 복 줄테니까 다시 나를 제대로 섬겨라! (농산물이 별로 안 난다고 1/10보다 적게 내어, 나를 섬기기는 커녕 떼어 낸걸 자기들 먹고사는데 쓰면서 복 달래? 그것부터나 똑바로 해라! 제일 쉬운 율법부터라도 똑바로 지키고 내가 복 주나 안 주나 봐라!)"


이걸 이해하려면 말라기 1장부터 보면 더 확실하다.

(말라기 1장은) 성전을 새로 세워 제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백성들이 더러운 빵과 눈멀고 병든 짐승을 바치고, 훔친 걸 바치는 등 개판이었다. 원래는 제일 깨끗한 것과 제일 좋은 것을 바쳐야 함에도 대충대충 하니까 야훼는 나는 너희들이 싫다고 말하며 제사 다 필요없고 성전 다시 닫으라 한다.

(말라기 2장은) 백성들이 하도 율법을 편파적으로 지키길래 한번 바빌론 유배라는 벌을 받게 한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혼하지 말라니까 이혼이나 하고, 우상숭배하는 여자들과 결혼이나 하는 등 개판이나 치고 있다고 야훼가 쓴소리를 한다.

(말라기 3장은) 레위지파를 깨끗하게 해주어 올바른 제물을 바치게 할 것이며, 악인은 심판하겠다. 그러면서 십일조가 나오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의인을 아끼겠다고 한다.

(말라기 4장은) 율법을 지키라고 강조하면서 악인을 심판하겠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해당 구절과 말라기 전체의 내용은 십일조를 그리스도교에서 내냐 마냐와는 전혀 상관 없는 구절이 되겠다.


더불어, 개신교의 관점에선 '돈'의 십일조를 하면 뻥튀기 시켜 자신의 재산이 몇배로 늘어날 것이라면서 미국 석유왕 록펠러 이야기를 든다. 심지어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라는 책도 있는데, 자신이 처음엔 회계장부를 쓰면서 십일조를 하다가 재산이 많아지자 40명의 회계팀을 구성해 십일조를 냈다고 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본문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말라기 3:10에서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왔으니 터전도 도구도 제대로 없고, 농사도 제대로 안되고 하여 먹고 살 길은 막막하니까 하나님께 바칠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남은 것들로 근근히 살아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 실망스러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진짜 농사가 잘 되게 해주는지 "나를 시험해보아라" 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절인 11절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예 본문을 10절 까지만 읽고 십일조 설교를 하는 설교가 대부분이고, 한 단락인 12절 까지 읽기는 하나 11절과 12절에 대해선 침묵하는 설교가 소수이다. 그 이유는 현금 십일조에 대해 독이 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말라기 3: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라고 한 것이다. 개신교의 논리라면, '돈'을 뻥튀기하는데 왜 뜬금없이 메뚜기 떼로 인해 농사가 망쳐졌으니, 메뚜기를 통제하여 농사가 잘 되게 해준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개신교의 논리로는 이 구절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다. 메뚜기, 땅, 포도나무, 열매 같은 명사들은 전혀 다른 것에 비유한 것이 아니다. 십일조의 대상은 '농산물' 이기 때문에 농사가 망쳐졌으니 농사가 되게 해주는지 안해주는지 십일조 제대로 하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십일조를 제대로 안해서 생계가 곤란했던 레위지파 사람들이 성직업무를 때려치우고 일을 했기 때문이다(느헤미야 13장).



※번외로 이 구절의 오역에 대한 자세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말라기 3:8~10

(사용한 성경은 개역개정판. 개역한글에서 도적->도둑 으로 개정했을 뿐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구절을 아무 생각없이 읽다보면 십일조와 봉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도둑질 한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 구절은 대한민국 개신교 성경들('대한성서공회' 개역한글,개역개정,(표준)새번역, '생명의 말씀사' 현대인의성경,'두란노' 우리말성경, '아가페' 쉬운성경)이 단체로 변개한 구절이다!


특히 8절과 9절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해 둔 '~의 것'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은 물론이거니와 기타 다른 나라말 성경들 모두 '그런 표현 없다'.


말라기 3:8~9 히브리어 원문

היקבע אדם אלהים כי אתם קבעים אתי ואמרתם במה קבענוך המעשר והתרומה 

במארה אתם נארים ואתי אתם קבעים הגוי כלו


이 부분에서 칼 동사 קבע 의 번역이 해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대부분 '강도질하다' 로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의 의미를 반영하자면 '숨기고 속여서 빼앗는다'는 의미다.


영어 성경 NJB(가톨릭)으로 확인해보면, 가장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이다. 칼 동사 קבע 를 속이다(cheat)로 번역하였다.

Can a human being cheat God?" Yet you try to cheat me! You ask, "How do we try to cheat you?" Over tithes and contributions.

A curse lies on you because you, this whole nation, try to cheat me.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신을 속일 수 있느냐?" 그러나 너는 나를 속이려 했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속이나요?"하고 묻는다. 십일조와 예물이다.

너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다, 이 온 나라에게, 왜냐하면 나를 속이려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번역자의 몫은 개인적 의견(또는 교단,교파의 의견)을 번역할 때 다는 것이 아닌, 원문 그대로의 느낌과 의미를 얻을 수 있도록 언어에 맞게 번역하도록 노력함에 있다. 이를 지키지 못했으면 번역자의 자질이 좋지 못함은 분명하다. 


아울러 대한민국 목사들이 심심하면 강단에 서서 히브리어 원문이 어쩌고 원어가 어쩌고 언급하는데, 이런 것이야 말로 "히브리어 원어는 이런데 원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고 이야기 해야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명사를 히브리어로 말하면서 자신이 잘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중에 목사가 하는 말을 잘 들어봐라. 대부분 히브리어, 그리스어 사용은 쓸데없는 명사에다 대고 하지, 중요한 동사에 하지 않는다.



  D)십일조는 율법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라 주장한다

창세기 14:17~24 아브라함(원래 이때는 이름이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1/10을 주었으니 율법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히브리서 7장을 추가해 주장하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법이나 전통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자기 입맛대로 골라선 안된다. 율법 이전의 전통이자 규례인 십일조를 지킨다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하며,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어선 안된다. 더구나 자손이 없으면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아야 하고, 노예 제도를 지지해야 하며, 일부일처제를 부정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1/10을 준 것은 십일조 제도도 아니었고, 1회성에 그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1/10 바친 사건과 달리 십일조 제도는 어떤 것을 내야하는지, 언제 내야 하는지, 사용처는 어때야 하는지가 명확했다.


히브리서 7장 을 살펴보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히브리서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레위지파의 제사장 체계를 다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레위지파 제사장 체계보다 멜기세덱 제사장 체계가 더 훌륭함을 강조 하는 것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정리하여 설명하겠다.


레위지파 제사장 체계는 족보도 있으며 시작과 끝도 있지만, 멜기세덱은 그런 것도 없다. 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하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그 조상이 멜기세덱에게 바쳤을 정도이다! 레위지파 중에서 일부가 제사장이 되었고, 제사장은 레위지파로부터 또 십일조를 받았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레위지파도 아니고 그 일부의 제사장 계통도 아닌데 십일조를 받았다. 그러므로 레위지파 제사장 체계보다 멜기세덱 제사장 체계가 더 훌륭하다! 한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10을 줄때는 아브라함의 허리(또는 몸으로 번역, 정액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해석은 약간 이상하다. 고대 사람들의 생각은 정액 개념까지 가지 못했으니까.)에 레위가 있었으니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바친 꼴이다! 시편 110편에도 표현하듯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했다. 영원한 제사장, 죽지 않는 제사장, 대제사장으로써 제물을 대신 바쳐주는 제사장, 그러면서 그 자신이 제물이된 제사장, 혈통으로 제사장이 아닌 제사장,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시다!


내용이 이해가 되는가? 히브리서 7장의 강조와 설명은 십일조가 아니라 '진정한 제사장은 예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구절도 십일조를 내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10 준 것은 '전리품'이다. 전리품에 대한 율법은 1/10 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전통이 신이 직접 말해준 율법보다 앞선다는 말인가?


민수기 31:25~30

2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6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집안 우두머리들과 함께 전리품의 수와 포로로 잡아온 사람과 짐승의 머리 수를 세어라.

27 너는 전리품으로 가져 온 것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전쟁에 나갔다 온 군인들에게 주고, 반은 모든 회중에게 주어라.

28 전쟁에 나갔다 온 사람들에게서는 나 주에게 바칠 세금 몫을 떼어 내어라. 사람이든 소든 나귀든 양 떼든, 그 오백분의 일을,

29 그들에게 나누어 준 절반에서 떼어 내어, 나 주에게 바치는 제물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라.

30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누어 준 절반에서는, 사람이든지 소든지 나귀든지 양이든지, 그 어떤 가축이든지, 오십분의 일을 떼어 내어 주의 성막을 보살피는 레위 사람에게 주어라."


마찬가지로 창세기 28:10~22 에서 야곱이 자신을 지켜준다면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일 뿐.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하면 곤란하다. 더구나 바쳤는지 안 바쳤는지 결과를 알 수 없다. 나오지 않는다.



3)낸다고 하더라도 사용처가 잘못 되었다


십일조는 제사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레위인과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고아,과부와 같은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십일조는 소외된 이웃에게 사용하는 양이 극히 적다고 조사된 바 있으며, 거의 예배당 건립에 돈을 쓰거나 담임목사와 그 가족들 어깨에 힘주려는데 사용되고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던 개신교가 애초에 존재자체가 없던 예배당을 짓는다는 것은 명백히 사기이다. 또 십일조를 걷어 그런 곳에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 목사는 레위지파 성직계급이 아니므로 받아 쓸 권리가 없다.



4)낸다고 하더라도 매달 걷는 것은 잘못 되었다


신명기 14:22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밭에서 거둔 소출(곡식,포도주,기름)'의 1/10을 1년마다 예루살렘에 내야 한다. 또 1년마다 1/10을 따로 떼어 자신과 그 가족끼리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썼어야 한다. 그리고 3년마다 또 다른 1/10을 모아 별로 받은게 없는 레위인과 소외계층(고아,과부 등)을 위해 쓰는 것으로 되어있다. 농사와 목축은 절대 1개월 만에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당연한 이야기이다. 허나 현대의 한국 개신교는 '매달' 걷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 십일조의 전통을 지킨다 하더라도 1개월에 1번 현금 월급의 십일조는 그냥 헛소리다.


원래는 곡식,포도주,기름(팔레스타인 지역의 3대 농산물) 정도에나 붙던 세금인 십일조가 나중에는 '기른 가축'에게도 십일조가 적용되었으며(레위 27:32), '박하,회향,근채'와 같은 잡 농산물에도 적용되었다(마태23:23).


한편 실질적으로 십일조를 걷어 사용하는 것에 이스라엘 전체가 삐걱거렸었다. 바빌론 유배이후 명확한 규례 보단 뭉뚱그려 사용되고 걷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제대로 안 걷어져서, 심지어 레위인들이 성직업무를 때려 치우고 일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내용은 느헤미야 13장에 기록되어있다. 맨 밑에서 살펴볼 것이다.



5)낸다고 하더라도 돈을 걷는 것은 잘못 되었다


(신명기 12:17) 당신들이 십일조로 바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서원하고 드린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은, 성 안에서는 먹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 14:23)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느헤미야 13:5) 그런데 그가 도비야에게 큰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 방은 처음부터 곡식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과 성전 문지기들에게 주려고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제사장들의 몫으로 바친 제물을 두는 곳이다.

(역대기 31:6)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 왔고, 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물건의 십일조를 가져 왔다. 이렇게 가져 온 것을 차곡차곡 더미가 되도록 쌓았다.


무엇을 십일조 해야하는지 예를 들어 써주고 있다. 곡식, 포도주, 기름, 소, 양 처럼 '땅에서 난 산물' 혹은 '잘 기른 짐승' 이다. 돈이 아니다.


지금은 화폐로 거래하니까 화폐로 내는게 맞지 않느냐는 반박이 있을지 모르나, 화폐는 창세기부터 통용되면서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모두 화폐로 십일조 낸 사례나 규례가 단 한개도 없다! 


창세기만 언급하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몇 세겔을 주었는가? 400세겔이다. 십일조를 바쳤다고 주장하던 아브라함도 돈으로 아내를 묻을 밭을 샀다. 또 형제들이 요셉을 몇 세겔에 팔았는지 잊었는가? 마치 돈이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개신교의 작태를 보라.


화폐를 제출한 사례는 사도행전의 신약시대에 재산을 모두 화폐로 바꾸어 '공동재산'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화폐를 쓰는 규정은 신명기 14:22~29 너무 멀어서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돈으로 바꾼 후, 돈으로 '구매를 하고 사용하라' 하였다. '돈으로 내라'가 아니라. 더구나 그 경우 세금으로 내는 십일조가 아니었다(2차 십일조).


더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 예수는 마태23:23(=누가11:42)에서 십일조는 박하,회향,근채를 언급하고 있으며 모두 '땅에서 난 산물'이다. 그렇게 십일조를 화폐로 내는게 중요했다면 예수가 돈으로 내라고 하거나 왜 돈으로 하지 않느냐고 언급했었을 것이다. 또는 율법에 그리하라고 애초부터 써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유다 역사상 화폐로 낸 적은 없으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원래는 농산물로 받다가 벌이를 늘리고 싶어 타락한 시대에 와서야 돈으로 내라고 규정을 바꾸어 걷어들인게 현대 십일조의 기원이다. 착각하지 마라.



6)신약의 돈개념은 십일조가 아니라 공동재산이다


(사도행전 2:24~25)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사도행전 4:32~35)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중략)..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공동재산으로 사용했고,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사도행전 5:1~11) 요약하자면, 공동재산으로 쓰려고 모두가 전부를 내놓을때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일부를 떼어서 내놓았다. 그것을 베드로가 호통치자 둘 모두 야훼를 속인 죄로 죽었다. 사실 십일조 보다 더 부담스러운 전통이다. 왜 이 전통을 숨기려하고 십일조를 부활하려 하는가? 왜 이 구절은 강단에 서서 설교하지 않는가?



7)사도 바울은 마음에 정한대로 내라고 했다


고린도후서 9: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가 내고 싶은 대로 내는 것이지 특정 비율이 아니다. 더구나 설령 현대의 현금 십일조를 낸다한들 억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지 않을 것이다. 1%를 내든, 10%를 내든, 100%를 내든 마음에 없었다면 그것은 가짜 헌금이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좋아한 바리새인과 다른 것이 전혀 없다. 


고린도전서 16:2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걸 보고 혹시? 할지 모르겠는데, 어지간히 글을 못 읽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일괄적인 비율로 저축하는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헌금모금 개념은 연보이며,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흉년과 기근이 들어 벌이가 없어진 시대이다. 그래서 모교회를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에 쓴 것이다. 바울이 쓰거나 예배당 건설이 아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을 시켜 보내겠다고 하면서 자기도 같이 가는게 마땅하면 같이 가겠다고 하고 있다.





※십일조의 진실

십일조에는 1,2,3차 십일조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차 십일조만 알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십일조 제도의 진실을 신자들에게 말했을 경우, 무언가 독이 되었던 것이 분명할 터. 1,2,3차 십일조는 본인이 직접 분류한 것이므로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차 십일조

-> 레위인과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 계통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신정국가의 세금.

(이것이 한국 개신교가 흔히 알고 있는 십일조의 개념이다.)


민수기 18장

레위 사람의 몫


21    "나는 레위 자손에게는 이스라엘 안에서 바치는 열의 하나를 모두 그들이 받을 유산으로 준다. 이것은 그들이 회막 일을 거드는 것에 대한 보수이다. 

22    이제부터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다가는 그 죄값을 지고 죽을 것이다. 

23    회막 일은 레위 사람들이 한다. 이것을 어긴 죄값은 레위 사람이 진다. 이것은 오고오는 세대에 언제나 지켜야 할 율례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아무런 유산이 없다. 

24    그 대신에 나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 곧 열의 하나를 그들의 유산으로 준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아무런 유산도 없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십일조를 받을 권리가 있던 대신 조상으로 부터 재산을 상속받지는 못하였다. 십일조를 받은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민수기 18장

레위 사람의 십일조


25    주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26    "레위 사람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내가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는 열의 하나를 받을 때에, 너희는 열의 하나 받은 것에서 열째 몫을, 나 주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려라. 

27    나는 너희가 바치는 그 제물을, 너희가 타작 마당에서 떼어 낸 곡식처럼, 포도 짜는 틀에서 떠낸 포도주처럼 여길 것이다. 

28    이렇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떼어, 나 주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리고, 나 주에게 드린 그 제물은 제사장 아론의 몫으로 돌려라. 

29    너희는 주의 몫으로는 너희가 받는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모두 바쳐야 한다.

30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희가 가장 좋은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칠 때에, 나는 그것을 레위 사람이 타작 마당이나 포도 짜는 틀에서 나온 것을 바치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31    그 나머지는 너희와 너희 집안 사람이 어디에서나 먹어라. 그것은 너희가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32    가장 좋은 부분을 들어 올려 바침으로써, 너희는 이 일에 죄를 짓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이 바친 거룩한 제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죽지 않는다."


-> 레위인들은 십일조 받은 것에 또 십일조를 해야했다. 왜냐하면 레위인의 십일조는 레위인 중에서 제사장인 아론 계통에게 주어야 해서 아론 계통이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2차 십일조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 준 십일조. 1차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이 또 2차 십일조를 행해야 했는데, 그것으로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사서(독주 마저도) 레위인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종과 함께 하나님을 생각하며 먹고 즐기는 것이었다. 이 십일조 규례는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어디에 '내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12장

17    당신들이 십일조로 바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서원하고 드린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은, 성 안에서는 먹을 수 없습니다. 

18    그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먹도록 하십시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와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 사는 레위 사람과 함께 먹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높이 들어 바친 모든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신명기 14장

22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3    당신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처음 난 소와 양의 새끼와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24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당신들은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그 돈을 가지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십시오. 소든지 양이든지 포도주든지 독한 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십시오. 

27    그러나 성 안에서 당신들과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번외로 한국 개신교의 (11번째 계명에 가까운) 금주 교리는 무너진다. 포도주는 물론 이거니와 '독주' 까지 마셔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는 일이므로 더욱 문제될 것이 없다.




3차 십일조

->별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소외계층(떠돌이,고아,과부)을 위해 3년마다 1/10을 베푸는(어디에 '내는' 것이 아님) 십일조. 평균적으로 매년 약 3.3% 정도.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어 먹게 하는 것이다. 


신명기 14장

28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위와 같은 1,2,3차 십일조가 철저하게 있었지만 실상은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다.


느헤미야는 말라기와 동시대 인물이다. 앞선 말라기 내용을 상기하면서 읽어도 좋다.


느헤미야 13장 전체정리(본문생략)

느헤미야는 유다지파 출신의 정치가이자 바빌론 포로 생활기에 고위 관리이다. 그는 성벽을 재건하고 유다교 종교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 과정이 13장에 나와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십일조를 제대로 걷지않아 레위인이 제사를 안하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어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등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뿐더러, 안식일에 장사를 하고, 이방인 여자와 결혼을 하는 등 개판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 현실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는데, 현대 개신교회에서도 십일조를 모두 내고 있지는 않는다는 점을 살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진배없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