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길 교수의 '성경 사본학의 현재와 미래'를 반박함

종교경전/본문비평 2014. 1. 21. 19:46

이 글은 '개혁신학과 교회 6(1996), pp.67-94.'에 실렸던 글이라며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예장고신, 국내3위 교파로 1위 교파인 예장합동과 합친 것과 다름없는 곳이다.) 신약학 변종길 교수가 자랑스레 올린 글이다.


변종길 교수는 

서울대학교(B.A.)

고려신학대학원(M.Div.)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Drs.)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Th.D.)


을 나왔다고 한다.

'->'와 '진한 글씨' '큰 글씨(10pt)'는 "전투적무신론"의 반론과 강조이다.

변 교수의 원문은 '작은 글씨(8pt)'로 되어있다.


※변 교수의 원 글과 나의 반론은 성서사본학(본문비평)의 지식이 없다면 읽고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 점을 독자들은 감안하며 읽어야 한다.


성경 사본학의 현재와 미래 - 


사람들은 “학자”(學者)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한다. 여러 가지로 때묻고 혼탁한 세상에서 그래도 학자는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진리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비록 권세도 없고 부귀도 못 누리는 학자이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존경을 표하게 되고 그의 말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특별한 가치를 두고 경청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학자는 그 신분상, 사회나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를 말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특히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분들에게서 그 기대가 깨어질 때에 우리의 실망은 더욱 크게 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 중에는 “신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신학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편견과 불공평이 있는가를 깨닫고 나면 그 실망은 참으로 클 것이며, 이 실망은 나아가서 분노로 바뀌게 될 것이다.


소위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불리는 “사본학”(寫本學)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소위 “본문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영미의 전통을 따라 “본문 비평”을 “하등 비평”(lower criticism)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보수주의 신학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나 똑같이 받아들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의 신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수주의, 개혁주의 진영의 신학교에서도 현대 사본학자들의 이론을 아무런 비판이나 유보없이 그대로 가르쳐 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본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도대체 생각이라도 해보았던가? 또는 그런 것 외에 또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기라도 했던가? 그래서 “사본학”이라고 하면 으례히 메츠거(Bruce M. Metzger)의 책을 교과서로 삼고, 신약 원어 성경으로는 네슬레(Nestle) 판을 최고로 여기고 사용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네슬레 26판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 원본을 소유한 양 좀 으시대던 것이 그 동안 우리 한국 신학계의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각성이 일어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네슬레-알란트 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또는 현대 사본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듣지도 못한 상태로 지나고 있지만, 그래도 소수 일각에서 사본학의 현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막연하나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물론 그 중에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 극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올바른 사본학의 정립에 도리어 역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현대 사본학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훑어보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또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개인적인 서론과 내용적인 서론. 본문비평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는 바를 밝힌다.



I. 네슬레-알란트 판의 지배

현재 전 세계의 신약 원어 성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판”과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iceties) 판”이다. NA 판은 1979년에 26판이 나와서 범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다가 1993년에 이것을 다시 보완한 27판이 나왔다. 그리고 UBS 판은 1975년에 제 3판이 나와서 널리 사용되다가 1993년에 제 4판이 나오게 되었다. NA 판은 19세기말 이래로 전통이 있는 판이고, UBS 판은 성경 번역자들을 위하여 1966년에 처음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래서 UBS 판은 “각주”(apparatus) 안의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고 사본, 역본들의 기호가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NA 판은 기호가 많고 식별하기 어려우며 “각주” 안의 설명이 라틴어로 되어 있는 것 등,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 두 판은 원리상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판의 편집진 5명이 똑같으며(NA 27판과 UBS 4판에서는 B. Aland, K. Aland, J. Karavidopoulos, C.M. Martini, B.M. Metzger), 또한 편집 원리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두 판은 각주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본문은 동일하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 판에 이미 있었던 현상이다. 왜냐하면 UBS 3판의 수정판이 1983년에 나오면서 1979년에 나온 NA 26판을 따랐으며, UBS 4판과 NA 27판이 이 본문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문단 나눔과 구두점 정도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UBS 3/4판은 NA 26/27판과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NA 27판/UBS 4판은 크게 보아서 그 이전 판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현금의 NA 판이나 UBS 판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다섯 명의 현대 사본학자들인데, 이 중에서도 1994년에 작고한 쿠르트 알란트가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일 뮌스터에 있는 「신약사본연구소」 소장을 오랫동안 맡아 오면서 네슬레 24판(1960) 이래 최근까지 희랍어 신약 편집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네슬레 26판은 사실상 알란트 판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그러한 경향은 27판에 와서 더욱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에 「공인 본문」(公認本文, Textus Receptus)이 누렸던 지위를 오늘날에는 알란트 판이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I. Karavidopoulos 요한네스 카라비도포울로스, 동방정교회의 테살로니키(*이른바 바울의 데살로니가 서신서가 이 도시의 가정교회에 보낸 것이다.)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NA-UBS 편집진이다. 이 사람은 시간전례(=성무일과, 성무일도)로 부터 본문비평을 하는 학자로 알란트 교수 부부나 메츠거 교수에 비해 학계 인지도가 훨씬 떨어진다. 변 교수는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위 내용 이외에는 거의 전무 하다시피 해, 이 사람을 무시한 채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II. 「공인 본문」(TR)의 붕괴 과정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1516년에 에라스무스가 최초로 희랍어 신약 성경을 편집 출판한 이후로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가 새로운 신약 성경을 출판할 때까지 약 300여년 동안 구라파에서 사용된 원어 성경은 네슬레-알란트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소위 “공인 본문”(TR)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300여년간 구라파 교회가 사용한 것이며, 또한 독일의 “루터역”(1522), 영국의 “흠정역”(King James Version), 그리고 화란의 “국역”(Staten-vertaling, 1630년대) 등 수많은 번역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구라파' '화란' 등의 단어를 쓰면서 뭔가 있어보이는 척 하지만, 1996년에 한국인 독자가 EuropeNetherlands를 읽을 줄 모를까봐 중국에서나 쓸법한 용어들을 쓰고 있다. 독일을 '독국'이라 하지 않음은 아마 몰라서가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공인 본문」(TR)이 붕괴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그 당시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성경에 대한 집요한 도전이 계속되어 왔었다. 물론 그 중에는 순수한 학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도 있지만 수백 년간에 걸쳐 진행된 그 과정과 결과를 돌이켜 때, 때로는 소위 학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17세기 후반에 살았던 존 밀(John Mill, 1645-1707)은 TR과 다른 3만여 개의 “상이독본”(相異讀本, variant reading)들을 모았으며, 이에 충격받은 벵겔(J.A. Bengel, 1687-1752)은 평생 동안 사본 연구에 몰두하였다. 물론 그는 경건한 학자로서 좋은 주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본 연구의 주요 원리 몇 가지는 그 후의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곧 “본문의 증거력은 사본의 숫자를 셀 것이 아니라 그 비중을 달아보아야 한다”는 것과 “필사자는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원리에 의해 사본을 “그룹”(계통)으로 나누게 되었으며, 두번째 원리에 의해 사본상 어떤 구절에 쉬운 독본과 어려운 독본이 있을 때에 그 중에서 어려운 독본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 두 원리는 그 후로 사본학계에서 마치 지극히 당연한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시되는 이 원리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벵겔. 이 학자로 인해 본문비평의 발전이 시작된다. 그 원칙의 기본 틀은 지금까지도 사용된다. 아마 변 교수는 본문비평이 '성서'에만 적용되는 줄 알았나보다. 모든 고대의 작품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문비평이 적용된다. 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면 문학 본문비평(그 안에 성서가 있다) 전체를 공격해야 할 터인데 아마 변 교수 개인의 지식으로는 모자라는 것은 당연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학파'가 몰두해도 먼지만한 흠집도 못낼 것이다.



그 후에 그리스바하(J.J. Griesbach, 1745-1812)는 사본들을 다음과 같이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곧, “알렉산드리안 그룹”과 “웨스턴 그룹”과 “비잔틴 그룹”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본문 선택 원리를 살펴보면 그의 사본학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는 이것을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데, 첫째로 “짧은 것이 더 어렵고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이상할 때에는 짧은 독본이 긴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긴 독본이 불확실하고 거칠고 부연 설명하고 이상하고 역설적이고 불경건하게 들리고 오류적일 경우에는 긴 독본이 짧은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잘 살펴보면 결국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본상 서로 다른 독본들이 있을 경우, 그 가운데서 어쨌든 “더 어렵고 애매하고 이상하고 심지어는 불경건하게 들리고 오류적인 것”을 원본으로 봐야 한다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에 의해 편집된 신약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진다면 그것은 매우 어색하고 문장이 잘 안 통하는 본문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다른 비평 학자인 라흐만(K. Lachmann, 1793-1851)은 1831년에 소문자 사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몇 개의 초기 대문자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 그리고 벌게이트와 교부들 인용을 사용하여 희랍어 신약 성경을 편집, 출판하였다. 물론 그의 목적은 4세기에 동방 교회에서 통용되던 사본을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로써 대부분의 소문자 사본과 후기 대문자 사본들이 취하고 있는 본문 형태인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이 제외 당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티쉔도르프(L.F.C. von Tischendorf, 1815-1872), 트레겔레스(S.P. Tregelles, 1813-1875), 알포드(H. Alford, 1810-1871)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현대 사본학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1881년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동료 교수인 웨스트코트(B.F. Westcott)와 홀트(F.J.A. Hort)가 두 권의 희랍어 신약 성경(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을 출판한 사건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두 사람의 공동 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젊었을 때에 카톨릭의 예수회 회원으로 훈련받은 바 있는 홀트가 주로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희랍어 신약 성경의 제 2권은 「서론」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서론」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본 이론을 체계적으로 진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태까지의 TR의 기본이 되었던 비잔틴 사본들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배격되고 새로운 사본들, 곧 바티칸 사본(B)과 시내산 사본(א)을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바티칸 사본을 주로 따랐는데, 웨스트코트-홀트의 성경은 몇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바티칸 사본을 수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코트-호르트(WH 라고 줄여 표현하는게 일반적이다)의 성서본문비평 이론 중 'א,B' 이른바 중립본문의 시작이다. 현대의 성서 본문비평에서는 이 표현을 쓰지도 않으며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새로운 신약 편집판에 대해 그 당시 교회로부터 거센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차 구라파에서 그 뿌리를 내려갔다. 에버하르트 네슬레(Eberhard Nestle)는 1898년에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성서공회”를 통해 간편한 희랍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은 새로운 사본 연구나 이론을 가지고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출판되어 있던 티쉔도르프(Tischendorf) 판과 웨스트코트-홀트(Westcott-Hort) 판과 웨이마우쓰(Weymouth) 판 가운데서 다수 독본을 취하는 방식을 따랐다. 이 중 웨이마우쓰 판은 제 3판부터 봐이스(Weiss)판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면 이 네슬레 판의 성격이 어떠했겠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티쉔도르프 판은 잘 알려진 대로 그가 시내산 수도원에서 발견한 “시내산 사본”(א)을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다. 그래서 이 티쉔도르프 판은 “시내산 사본”을 지나치게 선호했다고 종종 비판받고 있다. 그리고 웨스트코트-홀트 판은 앞에서 말한 대로 “바티칸 사본”의 대변자이다. 또한 베른하르트 봐이스가 소위 주석적 근거에서 편집했다고 하는 봐이스 판도 결과적으로는 “바티칸 사본”에 근접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네슬레 판이 어떠한 성격을 띠게 될지는 자명하다. 네슬레 판은 그 작업 원리상 애초부터 “바티칸 사본”을 주로 채택한 편집판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다가 “시내산 사본”이 약간씩 추가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에도 계속되다가 제 17판부터 위 “다수 본문”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전에는 참고할 수 없었던 파피루스 사본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 중심의 기조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1960년의 제 24판부터는 독일 뮌스터의 “신약사본연구소”의 소장을 맡은 알란트가 책임을 맡아 편집하고 있는데, 그의 주도 아래 네슬레 판은 많은 자료가 보강되었다. 그러나 그 기본 원리에 있어서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래로 큰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알란트 판이 주로 채택하는 사본도 역시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 그리고 몇몇 “파피루스 사본들”이며, 수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렉시오나리아(lectionaria) 증거들이 무시 또는 경시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7판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곡이다. 여기서부터 헛소리가 시작된다. 그 지루한 사본학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진정한 문제점 주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현대 본문비평의 결정판 NA-UBS 는 알렉산드리아계 사본의 중립본문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더군다나 소문자 사본을 무시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성무일도(아마 렉시오나리아는 변 교수가 공부했던 네덜란드어 일 것이다. 영어 lectionary는 성무일도.)를 무시한 적도 없다. NA-UBS는 모든 사본, 교부인용, 시간전례(성서일과,성무일도),번역본의 이문을 적고 있다. 그야 말로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NA-UBS에 대해 비난(비판이 아님)만 할 줄 알았지, 읽을 줄을 모르던지, 아니면 책이 없어서 사용해본 적이 없던지 둘 중 하나다.




III.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문제점


그렇다면 TR을 붕괴시키고 현재의 NA 시대를 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여전히 오늘날 사본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주요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의 “계보론적 방법”(genealogical method)이다. 그는 벵겔(Bengel), 제믈러(Semler), 그리스바하(Griesbach) 등의 방법을 따라, 사본들의 수적 우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사본들을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곧 “수리아 본문”(Syrian text), “서방 본문”(Western text), “알렉산드리아 본문”(Alexandrian text), 그리고 “중립 본문”(Neutral text)으로 나누었다.


->변 교수의 눈이 문제가 있는지, Syrian을 어떻게 ‘수리아’로 읽는지 의심스럽다. 그 잘난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사람의 언어 수준이 시리아를 수리아로 읽는다는 말인가? 물론 이는 개역성경에 시리아를 수리아로 잘못 적은 것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이 중에서 “서방 본문”과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에서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웨스트코트-홀트가 주로 표적을 삼은 것은 “수리아 본문” 곧 “비잔틴 본문”이다. 이 본문에 속하는 것은 대다수의 소문자 사본들과 후기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인데, 그들은 이것을 4세기의 편집자(들)이 편집한 본문으로 보았으며 매끈하고 쉽고 온전하게 만든 “혼합 본문”(mixed text)이라고 하였다. 이 본문의 특성은 “명료성”(lucidity)과 “온전성”(completeness)이며, 이렇게 수정, 편집된 본문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서 비잔틴 제국 안에 널리 펴졌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웨스트코트-홀트는 교회 안에 보존되어 온 거의 대부분의 사본들의 본문 형태를 4세기초의 어떤 편집자에 의해 수정, 편집된 결과로 돌려버림으로써 그 본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바, 4세기초에 안디옥의 “루키아누스”(Lucianus)가 비잔틴 본문을 편집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가설”(假說)에 근거한 이론을 가지고 수많은 사본들의 증거를 송두리째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비잔틴 본문,” 곧 대다수의 비잔틴 사본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 형태를 가치가 적은 것으로 돌려버림으로써 그것을 기초로 하여 편집된 TR과 나아가서 그것을 모체로 하여 번역된 대부분의 성경들이 불신 받게 되었다.


->뭐가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지 않는다는 건지 도저히 그 내용을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다. 더구나 호르트 박사의 판단이 검증되지 않았다하여 비판한다 해도, 비잔틴 본문이 변형된 본문임은 변하지 않는다. 현대 사본학이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누스가 비잔틴 본문 편집의 시초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상당수 비잔틴 본문이 후기 형태일수록 변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우리 모두가 직접 보고 있지 않은가. 호르트 박사가 비잔틴 본문을 저평가한 이유가 겨우 ‘루키아누스’ 때문이라면 도대체 전세계 문학 본문비평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듣고 싶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바티칸 사본”(B)과 “시내산 사본”(א)을 후대의 부패와 혼합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그래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들로 보아 “중립 본문”이라고 불렀다. 이 “중립”이란 명칭 속에 그들이 이 두 사본을 얼마나 편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강하게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곧, 이 “중립 본문”이란 명칭이야말로 그들의 이론이 중립적이지 못함을 분명히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두 사본은 원본에서 멀지 않다고 보았으며, 이 중에서도 특히 “바티칸 사본”은 원본에서 바로 온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웨스트코트-홀트가 편집한 신약은 사실상 “바티칸 사본”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1800여년 동안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던 대다수 사본들의 증거는 무시되고 말았다.


->‘편애’ ‘편견’ ‘선입견’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중립본문이라 부르며 그것들을 고평가 한 것에 대해 변 교수는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와 코덱스 바티카누스 보다 오래되고, 보존 상태가 좋고, Vellum에 썼고, 필사자가 감정변화 없이 필사 한 것이 있는가? 변 교수의 억지를 들어보면 똑같은 말의 반복을 길게 적어놓은 것 뿐이라, 반박할 만한 내용조차 없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의 중립본문이라는 작업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우기고 있는데, 문제는 지금은 그 분류를 쓰지 않으며, 변 교수의 지나친 걱정 및 억지주장과 달리 비잔틴 본문을 평가절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내용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러면 그들이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그들은 이 두 사본을 그토록 칭찬하고 선호했을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소위 그들의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 이론이다. 사본들이 제공해 주는 객관적인 증거를 “외적 증거”(external evidence)라고 부르는데 반해, 본문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독본들”의 상호 비교에 의해 얻은 결론을 그들은 “내적 증거”라고 불렀다. 이 명칭에도 또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슨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사실은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 또는 “개인적 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객관적인 사본상의 증거인 “외적 증거”와 같은 차원에서 “내적 증거”라는 말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외적 증거”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면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지면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구절에서 사본상 서로 다른 두 독본이 나타난다고 하자. 한 독본은 매끄럽고 온전하며 뜻이 잘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한 독본은 엉성하고 무언가 빠진 듯하며 뜻이 잘 안 통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럴 때 어느 독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둘 중에서 뜻이 잘 통하지 않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웨스트코트-홀트의 “내적 증거”의 원리이다. 그 이유는 문장이 매끄럽고 온전하며 뜻이 잘 통하는 독본은 후대의 필사자들이 수정, 편집해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소위 그들의 “동화”(同化, conflation) 이론이다. 즉, 필사자들은 원래의 거칠고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본문을 가능한 한 매끄럽고 온전하고 조화되도록 (곧 동화되도록) 수정해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독본을 취하지 말고 거칠고 이상하고 어색한 독본을 취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어떻게 보면 매우 그럴 듯한 것처럼 보이며, 현대 사본학에 있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기본 전제”처럼 되어 있다. 벵겔 이래로 거의 모든 사본학자들 의해 당연한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소위 “어려운 독본”(lectio difficilior)이 쉬운 독본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며, 중대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위험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원칙은 소수의 필사자가 고의로 또는 실수로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60명의 학생들이 수업하고 있는 반에서 선생님이 어떤 문장을 불러 주고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 적도록 했다고 하자. 그래서 선생님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불러 주었다고 하자. 58명의 학생은 정확하게 잘 받아 적었는데, 한 명은 띄어쓰기를 잘못해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적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중간의 말을 듣지 못해 “아버지가 들어가신다”로 적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세 개의 “독본” 중에서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깝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인가? 오늘날 현대 사본학의 이론을 따르자면 문장이 자연스럽고 잘 통하는 것은 후대의 필사자들이 수정, 편집했다고 보기 때문에 원본이 아니라고 판정하고,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고 뜻이 부자연스러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나 또는 뭔가 빼먹은 듯하고 이상한 “아버지가 들어가신다”를 원본으로 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본학계의 진수를 잘 드러내 준다. 그래서 현대 사본학자들이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 곧 “내적 증거의 원리”에 의해 편집한 신약 성경은 자연히 문장의 흐름이 이상하며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며 중간에 많이 빠진 듯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가 편집한 신약 성경이 그러하며 오늘날의 NA 판과 UBS 판이 또한 그러하다.


->무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변 교수가 직접 예시를 만들어서 현대 본문비평이 마치 이런 것인 양 적었는데, 완전히 무식한 예시다.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변 교수가 사본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변 교수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신약성서를 1500년 간 필사하고 보존하는데에 든 예시는,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받아쓰기를 하는데 극소수의 어린 학생들이 띄어쓰기를 안했거나 단어를 못 적었다고 하여 읽기가 어려운 받아쓰기 본문이 나왔는데 이는 극소수의 학생이 문제였으며, 다수가 옳다는 것이다. 신의 말씀 필사를 겨우 어린이의 받아쓰기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신을 믿으며, 예수를 믿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린이들의 소설 받아쓰기 내지는 베끼기 인데 말이다. 필사 작업에는 옆에 원본을 두고 베낀 것도 있고, 여러명의 필사자가 자리에 앉고 맨 앞에 필사할 본문을 불러주는 사람이 본문을 읽으면 다같이 필사한 것도 있다. 두가지의 경우 생기는 이문생성방식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인류가 보존하고 있는 사본은 그 중에서도 일부분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나 기관이 질 떨어지는 사본을 보존하려 하는가? 더구나 우리는 한 순간에 10명씩 앉아서 필사한 본문의 10개의 본문 중 10개를 다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사본의 연대는 천차만별이라서 1000년 이상 차이나는 사본도 부지기수다. 후대의 필사자들은 필사원본에 수정을 가한경우도 수도 없다. 변 교수가 그렇게 평가절하 하고 싶어하는 사본에도 사본의 최초 생성일로부터 수백 년 단위로 수정자가 최소 3명(א,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2명(B, 코덱스 바티카누스) 있다. ‘어려운 독법의 원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그저 ‘어린아이가 받아쓰기를 실수한 것일 뿐’ 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예시를 들고 있다. 내가 이 교수에게 반론으로써 ‘Lectio difficilior potior’를 알려주는 것 자체가 마치 ‘어린아이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는 것’ 같다.



이것을 실제로 성경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익숙해 있다. 우리 “개역 한글판”에 그렇게 되어 있고 NA 판과 UBS 판에도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본상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기도문 중 한 군데만 살펴보면 누가복음 11:2에 NA/UBS 판은 그냥 “아버지여”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독본을 지지하는 주요 사본은 p75와 א B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에 A C D W 등의 초기 대문자 사본들과 E F G H P Δ Θ Ψ 등의 후기 대문자 사본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소문자 사본들과 렉시오나리아들이 마태복음 6:9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NA/UBS 편집자들은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라, 수많은 객관적인 “사본상의 증거”를 무시하고 극소수 사본들의 증거를 취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1:2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비록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마태복음 6:9의 본문에 의해 “동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한 군데만 살펴보았지만 수많은 곳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NA 판이나 UBS 판은 바로 이러한 “내적 증거”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편집된 성경이며, 이 점에 있어서 1881년의 웨스트코트-홀트 판과 편집 원리 면에 있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르는 편집판들은 결국 객관적인 사본상의 증거를 무시 또는 경시하고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을 따르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본학계의 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NA/UBS 판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의 원본을 가지고 있는 냥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쿠르트 알란트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현대 사본학자들의 “비평적이고 주관적인 본문”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NA 판이 제시하고 있는 “각주”의 증거가 비록 학적이고 인상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자료의 제시에 그칠 뿐, 사실상 그 편집판은 B, א과 몇 개의 파피루스를 중심으로 그들의 “내적 증거”의 원리를 따라 만든 주관적 본문에 불과하다.


->자,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왠지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는 깜도 안되는 본문비평이다. 내가 본문비평 이론 중 한 부분만 사용하여 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려 한다. '원본문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라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그저 필사자의 실수인가? 필사자의 실수라면 누가복음이 쓰인 저자를 아는 사람이 원본에서 첫번째 필사를 실수 가득히 필사 하고 원본이 없어져 버렸을 때 그 잘못된 첫번째 필사본이 쭉 우리에게 짧은 주기도문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몇 백년후에 그 사실을 아는 필사자들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베껴와 누가복음에 써 넣었다면, 이는 충분한 가정이다. 과연 이 사실은 몇%의 확률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어떠한 이론보다 우등하고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IV. 웨스트코트-홀트 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모색

그렇다면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새로운 사본학 이론에 기초한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을 때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었는가? 아니다. 오늘날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은 별로 이의가 없는 정설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지만, 이미 그 당시 교회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문제점이 지적되었던 것이다. 특히 존 버건(John W. Burgon, 1813-88)은 그 당시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새로운 이론과 그것에 바탕한 새로운 신약 성경(Revised Version이라고 불렸음)을 비교적 상세히 분석하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비록 현대 사본학계를 대변하는 메츠거는 그를 “잃어버린 주장들과 불가능한 신념들을 옹호하는 챔피언”으로 악명 높다고 소개하면서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조롱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도리어 현대 사본학자들이 얼마나 객관적이지 못하며 편견에 빠져 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버건이 런던의 잡지에 발표한 세 편의 글들은 1883년에 The Revision Revised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버건은 웨스트코트-홀트의 “계보론적 방법”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선호한 א, B, D는 “현존하는 가장 부패한 사본들”(the most scandalously corrupt copies extant)이며, 그것들은 “가장 수치스럽게 절단된 본문들”(the most shamefully mutilated texts)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또한 이 사본들은 “조작된 독본들”(fabricated readings)과 “실수들”(blunders)과 “진리의 고의적인 왜곡”(intentional perversion of Truth)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스크리브너(F.H.A. Scrivener)도 1883년에 나온 그의 책에서 “홀트 박사의 이론은 역사적인 토대를 완전히 결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그 이론의 토대는 교묘한 상상의 모래 땅 위에 놓여져 있다”고 하였다.


-> [※Westcott-Hort의 그리스어 성서에서 영국에서 영어번역을 하여 Revised Version(*1911년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대본)이 나왔다. 또 미국에서 영어번역을 하여 ASV가 나왔고 이것 역시 1911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대본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RV와 ASV의 영어-한국어 번역본이다.]


호르트 박사를 비판한 일은 영국에서 있었던 일로 존 버건은 흔히 딘 버건(Dean Burgon)으로 불린다. 변 교수는 버건의 책을 제대로 읽어봤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버건의 주장과 근거를 가지고 와야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감정적인 대응(부패함, 수치스러움, 조작됨, 실수, 고의적인 왜곡)을 하는 단어들만 차용하여 글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Burgon(버건)의 주장은 무엇이었냐면, 교부들의 인용이 Traditional Text(전통 본문, Majority Text(다수 본문)는 곧 수용 본문(Textus Receptus)을 뜻한다)에서와의 일치는 2630건, Neologian(새로운 교리를 주창하는 사람, 비꼬아서 말한 이 사람은 Hort 박사를 뜻하고, 그 본문은 곧 Westcott-Hort의 편집본)과의 일치는 1753건 이며 3:2의 비율을 보인다고 Traditional Text of the Holy Gospels Vindicated and Established p.101(버건의 연구물을 다른 사람이 통계치 낸 것이다) 에 나온다. 사실 이 주장은 세세함을 알아보지 않고 단순히 통계를 낸 숫자놀음 이지만, 이 주장은 WH에서는 먹힐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립본문이라 부르며 א, B를 선호한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NA-UBS는 교부인용을 전부 싣고 있다. 그럼에도 WH를 까면서 그것을 계승한 NA-UBS를 까려는 변 교수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러나 대세는 웨스트코트-홀트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 후로 학자들은 차차로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과 그들의 「수정본」 신약을 지지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수많은 네슬레 판이 거듭된 오늘날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NA 판이 20세기의 TR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NA 판의 독주에 대해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에, 소수의 학자들과 목사들을 중심으로 이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그 뿌리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흠정역”(KJV) 옹호 운동이다. KJV는 1611년에 번역되어 그 경건성과 아름다운 문체로 인하여 수백년간 사랑 받아 온 번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1881년에 웨스트코트-홀트의 「수정본」(Revised Version)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되었다. 1901년에 이 RV의 미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ASV가 출판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개정한 것이 NASB(1971)이다. 또한 RSV(1952), NEB(1961), NIV(1978)도 출판되었으며, 최근에는 NRSV도 나와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TR이 아니라, 웨스트코트-홀트의 편집판 또는 그 계승이라 할 수 있는 NA/UBS 판을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사실이다.



이처럼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쏟아져 나오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영미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이 손상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뿐만 아니라, 1611년 이래 400년 가까이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고 있는 KJV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적 신앙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KJV 옹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Trinitarian Bible Society가 스크리브너(Scrivener)의 「희랍어 신약 성경」(1894, 21902)을 재출판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스크리브너 판은 KJV의 모체가 되었던 TR을 제공해 준다. KJV의 번역자들은 그 당시 베자(Theodore Beza)가 편집한 신약(그 중에서도 특히 1598년의 제 5판)을 주로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스크리브너 판은 이 베자 판과 미미한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다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말씀보존학회」가 1994년에 「한글 킹 제임스 성경」(신약 초판은 1990)을 내놓았는데, 오늘날의 많은 번역들이 잘못된 사본에 기초해 있음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본문(TR)을 옹호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다소 감정이 앞서서 지나친 주장을 한 것들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늘날 추적하기 어려운 사본들의 전수 역사에 대해 너무 자신 있게 단정하고 있으며, 또한 TR과 KJV을 지나치게 절대시하는 듯한 인상이 든다. 물론 KJV가 경건하고 좋은 것이긴 하나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KJV의 번역자들은 희랍어의 “시상”(時相, aspec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이것은 그 당시의 학문 수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일례로 KJV는 사도행전 19:2와 에베소 1:13 등에서 “부정 시상 분사”(aorist participle)를 한 시제 앞선 것으로 잘못 번역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로이드-존스 목사가 이 오역을 토대로 “믿음 후 성령받음”을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1982년에 나온 NKJV에는 이러한 오역들이 많이 시정되었다).


->TR에서 비롯된 KJV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400년 묵은 영어 번역본인 KJV에 대한 비판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 대안으로 Majority Text 에서 번역한 NKJV를 옹호하고 있다. 웃길 일이다. (*물론 KJV 근본주의자들은 NKJV 역시 사탄에 의해 변개되었다고 맹비난한다.)



다른 또하나의 흐름은 차분하게 웨스트코트-홀트의 이론을 재평가하고 현대 사본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하는 학적 노력들이다. 주로 미국과 화란의 보수적인 학자들과 목사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인데, 미국 내의 보수적인 신앙의 사람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그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피커링(Wilbur N. Pickering), 로빈슨(Maurice A. Robinson), 스터즈(Harry A. Sturz), 핫지스(Zane C. Hodges) 등이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을 옹호하고 있다. 화란에서는 판 브루헌(J. van Bruggen) 교수가 1976년에 출판한 조그만 책(The Ancient Text of the New Testament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에서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의 문제점을 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 제자 중의 하나인 뷔썰링크(W.F. Wisselink)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래 현대 사본학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화” 이론에 대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수많은 자료들을 컴퓨터로 처리해서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한지 여부를 검증하였다. 그의 결론은 “비잔틴 본문 형태는 그것의 조화적 또는 동화적 성격 때문에 열등하다고 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건전한 토대 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은 1982년에 핫지스(Zane C. Hodges)와 팔스타드(Arthur L. Farstad)가 편집한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가 미국의 최대 성경 출판사인 토마스 넬슨(Thomas Nelson)사에 의해 출판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희랍어 신약 성경은 1985년에 제 2판이 나왔으며 현재 한국에도 조금씩 보급되고 있다. 이 신약 성경의 서문에 보면, 오늘날 가장 유명한 두 희랍어 신약 편집판인 UBS(3판)과 NA(26판)은 이집트에서 기원한 적은 수의 고대 사본에 매우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주로 B, א와 몇몇 파피루스들), 따라서 이 편집판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은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소수의 몇몇 사본들의 증거에 반해 상당히 많은 대다수의 사본들은 그 본문이 거의 일치하게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 대부분의 일치하는 사본들의 본문 형태는 “대다수 본문”(Majority Text)이라고 불리는데, 토마스 넬슨사가 출판한 희랍어 신약 성경은 바로 이 “대다수 본문”을 토대로 편집된 것이다.


->왜곡이다. 이름은 거창하게 ‘다수 본문에 따른 그리스어 신약성서’이지만, 따지고 보면 TR의 부활이다. 이 그리스어 신약성서로 NKJV가 번역되었으니까. 이 와중에 그 서문에서 NA-UBS가 이집트 본문에 매우 많이 기초하고 있다는 둥 하는데 헛소리다. 중립본문 이라는 용어 자체가 폐기된 이 시점에와서 NA-UBS를 까려고 든다. 몇번이나 언급하지만, 중립본문에 의존해 NA-UBS 비평본문을 만든게 아닐 뿐더러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비평본을 낸 것이다. NA-UBS는 전세계 최고의 성서 본문비평 학자들이 모여 앞선 증거를 취합해 회의하고 토론한 것이다. 변 교수처럼 TR과 KJV계열을 지지하는 인간들이 실오라기 만한 흠집도 못내는 곳이다.



물론 이 “대다수 본문”(다르게는 비잔틴 본문, 수리아 본문, 코이네 본문 등으로 불림)을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이집트 사본들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의 것임은 사실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식하기 쉬운 파피루스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곳은 건조한 기후 조건을 가진 이집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다수 본문의 “본문 형태”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산 사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수리아 역본들이 거의 비잔틴 본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당시에 비잔틴 본문 형태를 가진 희랍어 사본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 수리아 역본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파피루스들 중에는 놀랍게도 비잔틴 본문을 지지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예를 들어 p46). 나아가서 “대다수 본문” 형태를 가진 사본 또는 역본들은 고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다. 수리아, 비잔틴뿐만 아니라, 고딕,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으면서 일치하는 수많은 사본, 역본들의 존재는 곧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사본들에서 전수되어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 본문”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심지어 현대 통계학 이론을 동원하여 “현재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본들의 본문 형태가 가장 오래된 사본 전수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승리도 가지가지 한다. 비잔틴 본문, 즉 다수 본문은 이름 그대로 그리스어 사용지역이었고, 당연히 성서도, 시간전례도, 성찬전례도, 심지어는 일상 생활도 그리스어로 하던 지역이다. 동로마제국인 비잔틴 제국이 망할 때까지 말이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어 본문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것들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스어 사용자들이기 때문에 내용이 자신의 지식의 한계, 또는 교리에 갇혀 이해하기 힘들 경우에는 본문을 수정해서 필사했고, 그것들이 점점 모여 최종에 이른 것이 비잔틴 본문의 후기형태이다. 또 코이네 그리스어인 신약성서 원문과 달리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비잔틴 그리스어로 시대가 달랐고 언어가 변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 언어는 적절한 자신의 시대에 쓰는 단어로 치환하여 필사하고 이해했기 때문에 변화가 크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며, 무작정 비잔틴 본문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비잔틴 본문도 원문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NA-UBS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비잔틴 본문의 읽기가 맞을 때는 그것을 읽으라 지시한다. 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계 그리스어 본문이 높은 평가를 받았는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중심지로 ‘고대’에 이미 본문비평이 이루어진 곳이다. ‘고대’에 사본들을 가지고 본문비평을 하여 원본문을 확립하고 필사하여 보존한 곳으로 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전수했다.




V. 우리의 방향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본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현대의 NA, UBS 판이 웨스트코트-홀트의 잘못된 사본학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희랍어 성경을 택해야 할 것인가? 그냥 옛날의 TR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아니면 더 대안이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의 사본학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은 물론 쉽게 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을 위해 여기에 우리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먼저 사본학과 관련하여서 커다란 조심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사실 우리는 사본의 전수 과정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어떤 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 사본의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는 있지만, 누가 어디서 어떤 계기에 의해 필사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특히 제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어느 사본을 대본으로 해서 필사했는지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또한 필사자가 어느 정도의 조심성을 가지고 필사했는지, 그리고 필사 후에 다시 원본과 대조해서 점검했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사본에 대한 여러 이론들은 대개 불확실한 추측에 근거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사본의 연대가 빠르다고 무조건 우수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2, 3세기의 파피루스라고 해서 너무 신뢰해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파피루스는 그 당시에 비교적 값싼 종이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어떤 사람이 개인적 용도로 급하게 필사했을 경우에 많은 오자와 부정확한 것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9, 10세기의 소문자 사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되는 것은 비록 후대의 사람이 필사했지만 초기의 좋은 사본에 근거해서 정성껏 필사하고 교정했다면, 그것은 4, 5세기의 대문자 사본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사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필자가 후대의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본의 필사 과정과 전수 과정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본에 대해 말할 때는 고도의 조심성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코트-홀트와 그후의 사본학자들이 비잔틴 본문 형태를 가진 사본들을 너무 쉽사리 가치 없는 것이라고 배척해 버린 것은 큰 잘못이다.


2. 그러나 오늘날 지배하고 있는 NA 판과 UBS 판은 잘못된 사본학의 원리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비잔틴 본문을 무조건 지지해서도 안되지만, NA 판과 UBS 판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오늘날의 NA/UBS판은 분명히 잘못된 사본학의 원리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과 몇 개의 이집트 사본들을 토대로 만든 “지역판”이며, 2천년 가까이 교회에서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던 대다수의 사본들의 증거를 불충분한 이유로 무시하고 있다. 대신에 그들은 소위 “내적 증거”라는 원칙 아래 서로 조화되는 독본들을 “동화”되었다는 구실로 가능한 한 배제하고 서로 조화되지 않고 어색한 독본들을 본문으로 많이 택하였다. 이러한 “동화” 이론의 배후에는, 그리스바하에게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의 원본은 가능한 한 조화되지 않는다는 “원본부조화가설”(原本不調和假說)이 놓여 있다. 그래서 서로 조화되는 독본은 후대의 필사자들이 가필해서 수정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배격해 버린다. 이것이 소위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현대 사본학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 하에 편집된 성경은 본문들 사이에 가능한 한 서로 충돌하고 맞지 아니하고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들로 많이 차 있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사실은 NA 판과 UBS 판이 이런 부조화 본문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이와 아울러서 NA 판과 UBS 판은 역사적인 어떤 사본의 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5명의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선택한 본문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은 몇몇 대문자 사본들과 파피루스를 중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위 “내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동화되었고 안 되었고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다섯 명의 편집자들이다. 그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결국 투표로 결정하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작업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로써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본문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말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NA/UBS 판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사본들의 “외적 증거”보다는 현대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을 더 따른 것이다. 따라서 NA/UBS 판이 제시하는 본문은 현존하는 어떤 사본에도 근거하지 않은, 다섯 명의 사본학자들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편집진이 바뀌면 또다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변적인 것이다. NA/UBS 판의 이러한 “주관주의”(subjectivism)와 “절충주의”(eclecticism)는 20세기의 현대 사본학이 외양적으로는 견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확실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준다.


->NA-UBS가 잘못된 사본학의 원리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나, 그 근거는 없고, 그저 다수본문이 맞다고 생각하는 변 교수가 억지를 부리며 변증하고 있다. NA-UBS 편집진이 겨우 5명이라 생각하는 것부터가 억지의 시작이다. 사본의 편집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학자들은 없던 셈 치는 것이 되며, 논란이 있던 구절과 근거는 전부 등급도 매기고 []를 달기도 했다. NA-UBS가 어떤 사본에도 근거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현재 남아있는 사본중에 원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사본들을 비교대조하여 만들어졌으므로, 당연히 비평본문은 창조물이다. 그건 TR도 마찬가지고, 변 교수가 억지를 부리면서 까지 지지하는 Majority Text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모든 고대 본문 비평된 문헌들에게 있는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변 교수가 무식한 것이 아닌가?



3. 이런 점에 있어서 1982년과 1985년에 나온 MT 판은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주가 되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대다수의 일치하는 사본들의 독본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견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의 몇몇 사본학자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본문을 따르는 것보다는 2천년 가까이 교회에서 사용되던 사본들의 본문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낫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MT 판이 바로 원본의 말씀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MT 판 편집자들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편집판(1985)이 “예비적”(preliminary)이고 “준비적”(provisional)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대다수의 희랍어 사본들의 가치와 권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의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MT 판은 아직도 많은 연구와 보완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이고 비평적인 편집 원리에 의해 편집된 NA/UBS 판에 비해서는 훨씬 객관적이고 역사적 증거가 있는 본문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사본학과 관련하여서 아직도 많은 연구가 진전되어야 하겠지만, 현단계에서는 MT 편집판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TR이 가장 나은 대안이 아닌가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TR도 비잔틴 사본들을 토대로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TR과 MT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TR 판들은 아직도 비잔틴 사본들의 자료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TR은 하나의 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판들(Erasmus, Stephan, Beza, Elzevier 판 등)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인데, 300여년간 구라파 교회에서 받아들여서 사용한 희랍어 신약 성경의 본문 형태를 뜻한다. 그러나 최근의 MT 판은 TR 뿐만 아니라, 20세기초의 폰 조던(Von Soden)의 비잔틴 사본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대다수 사본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을 좀 더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MT 판은 옛날의 TR보다 한 걸음 더 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MT 판에는 TR의 본문과 다를 경우에 밑의 “각주란”에 그것이 표시되어 있으며, 대다수 본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웃음 밖에 안 나오는 무식의 극치이다. Majority Text가 대안이라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 나는 여태 이 긴 글을 읽으며 그 지지근거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4. 사본학의 장래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본학 분야는 워낙 방대하고 복잡한 것이라서 아직 결정적인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주로 독일 뮌스터의 “신약사본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문제는 그들의 사본학의 원리와 신학적 전제이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도 많은 중요한 자료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경시한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NA 26판(UBS 3판)에서 NA 27판(UBS 4판)으로의 진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필자의 “UBS 4판과 NA 27판에 나타난 현대 사본학의 동향,” 「개혁 신학과 교회」 4호 (1994), pp.53-66 참조), 비록 더 많은 자료들이 참조되고 각주에 실리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본문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전의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여러 군데에서 편집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더 강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사본학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올바른 믿음에 바로 선 학자들의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특히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웨스트코트-홀트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며, 사본학의 기본 전제처럼 여겨지고 있는 “어려운 독본 우선의 원칙”과 “동화 이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증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소문자 사본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여태까지의 사본학은 주로 몇 개의 대문자 사본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고 있는 방대한 소문자 사본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앞으로 많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렉시오나리아(lectionaria)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다. 교회에서 공적으로 낭독될 때 사용되었던 렉시오나리아 본문은 거의 모든 곳에서 비잔틴 본문과 일치하고 있는데, 렉시오나리아는 교회의 공예배시에 낭독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상 보수성과 엄격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들을 연구하고 참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알란트는 NA 26판에서 이 자료를 거의 무시했으나, NA 27판과 UBS 4판에서 데살로니카의 렉시오나리아 연구소 소장인 까라비도뿔로스(J.Karavidopoulos)를 편집 위원으로 가담시킨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그 자료들이 본문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파피루스 사본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 2, 3세기의 파피루스들은 웨스트코트-홀트의 기대를 뒤엎고 예상외로 비잔틴 본문 형태를 지지하고 있는 것도 많다(특히 p46).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파피루스들의 증거는 대개 웨스트코트-홀트의 “중립 본문”을 지지하는 것과 “비잔틴 본문”을 지지하는 것이 나뉘어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파피루스에 대한 더 많은 연구는 사본 전수 과정에 대해 좀 더 밝은 빛을 비춰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오늘날 발견되는 파피루스들이 이집트 지역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또한 파피루스가 값싼 재질이기 때문에 조심성 없이 필사한 파피루스들은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리아 역본, 아르메니아 역본, 고대 슬라브어 역본, 에티오피아 역본 등에 대한 연구도 사본에 대한 좀 더 넓고 균형 잡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NA26 UBS3와 NA27 UBS4는 개정하면서 본문의 변화는 아예 없었고, 자료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시간전례 본문을 연구하는 학자 중의 최고가 이미 NA-UBS 편집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시간전례 본문이 무시된 적은 없으나, 변 교수는 마치 앞선 단락에선 완전 무시된 것으로 여기고서는, 시간전례의 대학자가 들어왔으나 본문의 변화가 없었다며 마치 통탄할 일인 것 마냥 쓰고 있다. 그 학자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본문의 변화를 가져올 만큼의 증거가 편집진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없어서' 였을 뿐이다. 그의 의견이 NA-UBS에 심각한 도전을 가지고 왔다면 당연히 그 결과는 논란으로 라도 분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현 상태를 보인다. 변 교수는 NA-UBS가 마치 TR로 편집되기를 원하는 듯이 말하고 있다. NA-UBS의 편집기준은 비잔틴 본문‘만’가지고 하는게 아니라 모든 사본 및 인용구와 번역본 까지 고려하여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Majority Text 처럼 주관적인 비평본문이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사본학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를 많이 지니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처럼 사본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의 차이가 크고 전혀 다른 편집판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볼 때에,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성이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본상의 차이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국한되어 있거나 의미상 큰 차이가 없는 것들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는 같은 의미이지만 단어가 다른 경우라든지, 또는 같은 단어인데 시상이 다른 경우도 제법 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의 뜻에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사본상의 차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벵겔이 평생 동안 사본을 연구한 후에 내린 결론, 곧 “상이 독본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적고 또한 복음적 교리의 어떠한 조항도 요동시키지 못한다”는 결론을 오늘날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곧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5천여 희랍어 사본들 중 대다수의 사본들이 거의 일치하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보존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끝>


->전투적무신론의 종합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이 글을 다 읽은 독자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 글은 쓸데없이 매우 긴 글로 역사나 읊다가 억지비난을 반복했다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용어들이 튀어나왔다가 하는 등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잘 모르는 독자들은 변 교수의 말이 사실인 것 인 양 들렸을 수 있다. 본인이 볼 때 변 교수는 본문비평에 대한 지식이 '성서(신약)'에만 한정되어 있다. 그는 원래 '본문비평'이 고대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모든 문학작품에 쓰인다는 것을 모른다. NA-UBS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본문비평을 할 줄도 모르는 듯 보인다. 다만 변 교수는 역사에 대해선 잘 꿰고 있다. 만약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 주장들을 분리해 내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글은 '간략히 보는 사본학의 역사' 라는 제목으로 소일거리용 책의 한 챕터로 다룰만 하다.


더구나 변 교수가 하려했던 현대 본문비평학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반론해내지 못했고, 주장도 억지였던데다, 근거도 너무 빈약해 마치 '어린아이'의 기고글을 읽는 것 같았다.

KJV(제임스 왕 흠정역 성경)의 역사와 의의와 문제점

종교경전/번역성경 2013. 3. 27. 23:19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역사

제임스 1세 왕은 스코틀랜드에서 원래 왕(제임스 6세)이었는데 기존 영국 연방 왕가의 대가 끊기자 영국 연방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영국 연방 여왕에서 폐위되었고, 자신이 왕이던 스코틀랜드의 스코틀랜드 장로회와는 원수지간에 가까웠으며, 죽은 여왕과 외사촌이긴 했으나 왕조가 바뀌어 버렸고, 유아 시절부터 왕이 된 그에게 대한 불만족스러움과,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폄하, 영국 성공회와 마찰, 의회와의 수 많은 마찰 등으로 말이 많았다. 


영국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각각 군주가 있었다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는 합쳐져 왕이 있었고 잉글랜드&아일랜드 왕과 스코틀랜드 왕이 있었다가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아일랜드 왕을 이어받게 되면서 잉글랜드&아일랜드&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 부터 3군데 왕을 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는 정치적 목적으로 왕권강화의 필요성이 있었던데다, 영국 내부적으로 교회 자체가 분열되어 있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종교개혁의 산물로 영국 성공회와 장로회(청교도)로 갈라져 싸움질이나 하고 있었고 국가를 하나로 모으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보다 약 100년 전의 영국 왕 헨리 8세는 혼인무효와 관련해 영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교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빼앗았으나 처음엔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던 것과는 별 상관없이 정치적 목적으로 빼앗았다. 결국 얼마 못가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 회귀 했다가, 제임스 1세의 전임 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야 비로소 다시 회귀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종교 개혁적 손질을 하여 영국 성공회 라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그걸 바라본 청교도들(스코틀랜드 장로회)은 로마 가톨릭의 냄새가 짙은 불완전한 종교 개혁이 무슨 종교 개혁이냐고 반발하면서 새롭게 다시 개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황에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종교 일치와 성경 일치이다. 여담이지만 종교 일치를 위해 청교도들을 성공회로 이동시키려고 강압적으로 정치를 했고 그 결과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도망가 미국을 세운 것이다. (그들의 후배?(후손?)들이 결국 조선으로 선교하러 들어와 무혈입성하고 일제와 미국과 독재에 빌붙으며 성장한 대한민국 장로회가 되었고 그들이 우리나라를 주름잡은 것이다). 더구나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신정설)을 주장하여 엄청난 왕권을 꿈꿨다. 제임스 1세가 당시 시대에 앞장서 주장했고 성경과 종교일치도 결국은 자신이 절대왕권을 가지고자 한 것이다. 후에 진정한 왕권신수설을 이룬 사람은 태양왕 루이 14세이다.


어쨌든 성경의 번역을 둘이 함께 하면 둘 사이의 앙금도 해소될 겸, 분열이 아닌 통일을 할 수 있고, 왕권강화에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당시 성공회의 주교의 성경(Bishop's Bible)과 장로회(청교도)의 제네바 성경(Geneva Bible)과 틴데일 성경을 개정한 대성경(The Great Bible)이 경쟁하고 있었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싸움의 대부분은 주교의 성경과 제네바 성경의 싸움이었다. 청교도의 제네바 성경은 책의 1/4은 주석이요 3/4는 본문으로 본문 한줄 읽고 난외 주석을 읽어야 하여 본문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들어 특히 제임스 1세가 싫어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명령하여 모든 교회에서 읽을 수 있고 난외주가 거의 없는 성경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KJV를 만드는데 7년 걸렸고 출판했다. 영국이 강대국이 되고 영어가 거의 공용어가 되면서 KJV은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40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살아남았다.



-의의

왕의 명령으로, 47명의 학자가 모여 만들었으며, 장로회와 성공회의 화합을 도모한 점, 짧고 굵게 리듬감을 주어 번역하여 읽을 때 힘이 난다는 점, 긴 역사를 거쳐 살아남은 점, 단일 역본으로 엄청나게 팔린 점 등이 거론된다.


또 KJV는 영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KJV 이후의 영문학을 공부하는데 KJV를 빼면 남는게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현재에도 영어권 국가의 회화나 글에서 어디에 빗대거나 표현을 할때에 툭 하면 KJV의 표현이 등장한다.



-문제점

구약은 그리스어 70인역이나 라틴어 불가타를 번역했고(히브리어 마소라도 참고는 했으나 우선적인 수용은 아니었다), 신약은 TR(수용본문)과 라틴어 불가타, 구약 외경(가톨릭 표현으론 제2경전)은 대체로 바티칸 사본을 참조한 그리스어 성경과 일부 라틴어 불가타를 사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설명한 대본을 사용하긴 했는데 대체로 KJV를 만드는 번역원칙에는 영어 성경(그중에도 주교의 성경)이 우선이었다. 더구나 문제는 기존 영어성경(구체적으로 제네바 성경)을 그대로 베끼기 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번역이 완벽하다면 베꼈다 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으나 그 부분이 상당하다. 웃긴 것은 성공회 번역자들이 장로회 성경을 그대로 베낀 것에 있겠지만 말이다.


더구나 KJV은 성경의 원문이 아닌 교리를 담은 성경이다. KJV을 달달 읽고 외우면 교리를 한번만 들어도 아 그렇구나 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기 전의 교리들(물론 그것이 나름 정통교리이긴 하다)로 원문을 변형시켜서 갖다가 박은 것이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신학적 입장으로 바라보면 별로 좋지 않다. 역사와 의의와 문제점을 다 제쳐두고라도, 누가 되었든 간에 전체적 내용파악 하는데는 KJV이든 아니든 전혀 문제가 없다. 일반인에겐 이런 논쟁은 별로 중요치 않고, 신학논쟁에서만 의의를 얻는다. 한 단어까지 일일이 따져드는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좋은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7년에 걸쳐 만들었으나 실질적으로 집필한 기간은 반도 안된다. 앞의 반은 개인연구하는데 시간을 들이고, 뒤에 일부는 얼른 써내기 바빴고, 교정작업을 하도록 보낸 후 몇 개월 만에 완성해 출판한 것이다. 왜냐면 급했으니까. 왕권 강화 하려고 몇 십년을 기다리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시 학자들의 언어적 이해도가 현대 학자들의 언어적 이해도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것은 웃기다. 지금은 컴퓨터로 단어 치면 의미와 예문까지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것 까지 나오지만, 그 시절은 연구도 부족했으며 단어 하나의 의미 찾는데도 한참 걸리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KJV의 그리스어 신약 대본은 TR(수용본문)이었다. 이 당시에는 인쇄술로 찍어낸 최신이자 최초의 그리스어 성경이었지만 지금 TR은 엄청난 공격을 당했고 권위는 무너졌다. TR이 무너지면서 KJV 역시 같이 신학에선 권위가 무너져 버린 성경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