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중 무신론자/불가지론자 비율이 나온 근거

무신론 2013. 9. 21. 23:34

과학자들중 무신론자/불가지론자 비율이 나온 근거


http://www.creationists.org/response-to-nas-science-evolution-creationism-book.html


이 홈페이지는 젊은 지구 창조설 지지자들의 홈페이지이다.


그들은 NAS(미국국립과학협회) 회원의 93%는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라고 적고 있다.

나머지 7%는 인격신의 존재를 믿거나,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진화론과 타협한 사람이거나, 과학지식으로 신화를 부숴버리는데 사용하는 사람).


진화론 지지자 홈페이지에서 이 통계를 사용하면 자기네들 유리한것만 사용한다고 하겠지만

창조설 지지자 홈페이지에서 자신들이 불리한걸 알면서도 사용한다. 사실이기 때문에.


내가 일방적으로 과학자들은 믿지 않는다고 허공에 짖었으면 신빙성이 없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설자들(이른바 지구 역사는 6000년이라 주장)'이 직접 인용하고 있다.


이 홈페이지의 목적은 젊은 지구 창조설이 진짜이며 그에 반하는 진화론자 욕은 물론이고, 7%의 배신자 집단까지 싸잡아 욕하고 반론하고 있다. "최고의 과학자 중 7%나 있어"라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참고로

http://www.discovery.org/a/10171

이곳에서 인용한 조사에서는 NAS의 거의 95%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라고 적고 있다.


그 외의 기타 조사들을 봐도 무신론/불가지론자, 신을 부정하는 사람,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사람 등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가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온 예수

경전 외부자료 2013. 9. 21. 23:28

[63] Now there was about this time Jesus, a wise man, if it be lawful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doer of wonderful works, a teacher of such men as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He drew over to him both many of the Jews and many of the Gentiles. He was [the] Christ. And when Pilate, at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al men amongst us, had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that loved him at the first did not forsake him; for he appeared to them alive again the third day; as the divine prophets had foretold these and ten thousand other wonderful things concerning him. And the tribe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are not extinct at this day.


이때, 예수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었다. [만약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믿기 힘든 대단한 일을 했고, 진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이방인들(그리스-로마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그리스도(메시아) 였다]. 필라투스가 우리(유대인)중 지도자의 고발로 그를 십자가에 처형 했을 때에, 그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일만에 다시 살아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이것을 예언했고, 1만개의(많은) 그에 대한 다른 놀라운 것들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붙은 이름에 따라 크리스천(그리스도인) 이라 불린 집단이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존재한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 63. translated by 전투적무신론


1세기 저작물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언급하는 부분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허나 저자인 요세푸스는 유대반란 당시 항복하여 역사가로써 지원을 받으며 저작 활동에 전념하였지만, 유대인의 배신자였기 때문에 그의 자료는 유대인들에게서 필사되고 읽혀진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 ] 부분은 최소한 이 부분만은 그리스도인들의 가필로 여겨지며, 문체나 단어가 요세푸스의 것이 아닌데다, 역사적 진술과는 거리가 먼 덧붙인 말이다.

( ) 부분은 요세푸스가 표현한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의역한 표현이다. 나머지는 직역.


회의론자들은 '예수 부분 자체가 조작이며 그것이 없어야 앞뒤 내용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신빙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부분만 제거해서 앞뒤를 연결한다면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지므로.


현재의 결론은 내용 중간중간에 삽입된 그리스도인들의 가필을 제거해서 최소한의 본문을 남기는 것으로 합니다. 


즉, '요세푸스가 진짜로 썼다면 이정도 본문은 진짜 있었을 것이다' 라는 부분입니다.


예수 부분이 조작 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부분 조작이냐, 전체 조작이냐로 나누어져 있을 뿐. 물론 그것을 확정 지을 만한 사람이 없지요. 요세푸스는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사람이니까. 타임머신 타고 요세푸스가 쓰고 있는 모습을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건 어느 작품이든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래서는 논의의 진행이 안되고 서로가 허공에 짖을 뿐이니, 그런 말은 말장난이며 쓸데 없는 부분입니다. 즉 '조작 되었을 것' 이라는 표현이나 '조작 되었다' 라는 표현이나 지금 상황에서 단어 분석, 문체 분석, 내용 분석, 편집 분석 이라는 압도적 증거로 해당 가필을 제거한 마당이므로 둘 다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이겁니다.


원래는 '아마도 조작 되었을 것' 이라 표현해야 함이 옳지만, 지금은 학계 결론이 '조작 되었다' 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학계의 논쟁은 '부분 조작 vs 전체 조작' 의 구도로 되어있지, '조작 vs 조작 아님' 의 구도는 이미 끝났습니다.

심상법 교수의 '과부의 헌금' 해석을 반박함

그리스도교/개신교 2013. 9. 21. 03:09

심상법 교수는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부산대학교(B.S.) 

부산고려신학대학원(M.Div.) 

Biblical Theological Seminary(STM) 

University of STELLENBOSCH(Th.D.) 


를 나왔다고 한다.


내가 반박할 글은 "막12장 : 성전에서의 논쟁과 가르침 / 심상법" (두란노출판사 '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이고, 먼저 나의 글부터 읽고 뒷부분은 그 교수의 글에 반박을 달았다.


이 글은 본인의 글 http://militantatheism.tistory.com/1 에서 일부 퍼온 것이다. 원본에 일부 가감하였다.


  B)헌금을 마치 없는 상황에서도 전부를 내야하는 정도의 것으로 생각한다

(누가복음 21:1~4=마가복음12:41~4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예수가 '액수나 비율이 중요한게 아닌, 헌금을 내는 마음가짐이 올바른 과부'를 보고 칭찬한 것 처럼 보인다. 이는 상당수 성경주석이 그렇게 적고 있는 것에도 한 몫 한다. 그러니 신자들은 자연스레 "xxx 목사님이 주석 단 거니까"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유명한 성경주석들도 그렇게 적고 있다. 


이 구절의 최대 실수는 '문맥을 무시하고 읽었을 때'에 발생한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말한 이 성전은 '제2성전(헤로데 대왕 성전)' 이다.


마가복음에서는 11:27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와 13:1 에서야 성전에서 나간다.

누가복음에서는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정확하게 써 있지는 않다.

20:1부터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어느날 벌어진 설교라고 적고 있고 21:37에서 낮에는 성전에서, 밤에는 올리브 산에서 지냈다고 적혀있다.


어쨌든 설교의 배경은 '성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과부의 헌금' 사건 바로 전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다(평행본문 마가 12:38-40)


45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의 구절을 잘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과부의 헌금 사건은 율법학자를 비난하며 예시를 든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의 예시가 곧 생활비 전부를 넣게한 사건인 것이다.


2 렙돈 = 1 고드란트 = 1/64 데나리온

1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임금 (마태 20:2) 이므로 일당 5만원이라 치고 계산하면 약 781원 정도이다.


쉽게 생각해, 1000원 한 장 헌금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율법교사들은 이런것마저도 율법 운운하며 성전에 들어와 예물을 드리도록 해 가난한 과부의 돈을 꿀꺽 한 것이다.


이야기 구성을 다시 해보자.

예수 曰 "율법학자들의 율법강조를 조심해라. 율법학자들은 예복 입기, 장터에서 인사받기, 회당의 높은 자리 앉기, 잔치에서 윗자리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꿀꺽하면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율법학자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말하는 와중에 성전에 있는 헌금함을 보았는데 부자들이 100만원 수표 내는 것과, 과부가 1000원 내는 것을 보았다. 이 헌금함은 성전에 출입했으니까 돈 내라는 전형적인 율법적인 장치였다) "부자들은 돈이 넉넉한 와중에 100만원 냈지만, 과부는 당장 돈이 없는데도 1000원을 내었다. (액수는 제쳐두고)저 과부가 제일 많이 넣었다" (부자는 100만원 내도 생활에 지장받지 않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냈는데, 과부는 혜택을 받아야 함에도 율법을 운운하며 넣게할 정도로 더러운 놈들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자기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데도 전부를 넣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혜택을 받아야할 과부들이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함에 대한 예수의 분노이다. 과부가 왜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는 원본글(※십일조의 진실)에 적혀 있으니 참고하라.


더구나, 만약 이 부분을 예수가 과부를 칭찬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 흐름을 깬다. 마가복음 11장~13장과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간 후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았고, 그에 대해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권한에 대해 문제 삼았으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비유로 이야기 하자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며, 바리새인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시험을 했고, 사두개인들과는 부활 논쟁을 벌였으며, 논쟁을 본 율법학자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고,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였으며(이 와중에 과부의 헌금이 나온다), 성전을 나가는데 성전이 전부 무너질 것이라 말하고 종말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가르친다.


마가복음 11장부터 13장의 내용까지 살펴보았다. 요약문만 읽어봐도 예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있으며 흥분해있다. 예수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고 얼굴은 찌푸려져 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하고 난리통이다. 시골촌놈을 어떻게 잡아볼까, 죽여볼까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까지 나선다. 성전에서 들어와서 나가는 순간까지도 예수와 대제사장과 율법교사들은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화가 나있다. 이 와중에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두 절도 채 안되는 부분인 과부의 헌금을 칭찬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이상하다. 허나 많은 주석서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그 대표격으로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심상법 교수의 해석을 꼽아보겠다.


다음 내용은 두란노 출판사의 '목회와 신학'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내용을 모아서 출판한 'HOW주석-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라는 책에 있는 것이다. 이 책 소개에 의하면 '국내 최고의 전공자들이 필진으로 참여' 했다고 한다. 그중에 심상법 교수는 마가복음 12장에 대해 주석을 썼다.


내용 전문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와 '굵은 글씨'는 본인(전투적무신론)의 글이다.


"막12장 : 성전에서의 논쟁과 가르침 / 심상법"

4.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가난한 과부(막 12:38-44)


이제 예수님은 두 종류의 극단적인 종교적 실천의 모습을 소개하심으로써 성전에서의 그의 사역을 종결짓고있다. 하나는 종교를 빙자한 서기관들의 그릇된 행동(중한 심판을 받을 행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무명의 가난한 과부의 헌신된 모습(칭찬 받는 기억될 행동)이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서기관들의 잘못된(인간적) 가르침(12:35-37)에 이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12:38-40)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12:40).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비유를 통해 제시되어 졌다. 그리고 연이어 이들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성전에서 자기 모든 소유(삶) 곧 생활비 전부를 바친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된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다가 올 예수의 희생(죽음)의 참다운 의미를 예시한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의 행동은 기독론(예수의 죽음)의 예시임과 동시에 제자도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가난한 과부의 행동이 기독론의 예시며 제자도의 모델이라는 것에 대해 웃고간다. 애초에 쓰레기 해석으로 시작한 주석이다.


특히 이 여인의 모습은 서기관들의 모습(막 12:38-40)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기관들의 모습은 성전제도의 타락한 모습(11-12장)과 관련되어있다. 결과적으로 성전 멸망의 요인은 이들의 모습 속에서 찾을 수 있다(12:3-9, 40과 13:1-2). 이들의 모습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회당의 상석과 잔치의 상좌를 원하는 것, 과부의 가산까지도 삼키는 것, 그리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들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올바른 예배의 시행과 함께 율법을 백성들에게 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성전예배와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확장하는 도구로 오용(남용)하였다. 


->전혀 대조를 이루지 않는다. 과부는 율법의 피해자이며,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율법학자들이 법을 운운하여 돈을 떼가는 것에 예수는 분노했다.


이처럼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중 마지막으로 소개된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11-12장에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성전을 섬기는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성전(종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채우는데(과부의 가산[家産]까지 삼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어 구제에 힘썼다. 사실 이 여인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미천한 행동에 불과하였다. 그녀의 신분(과부)이나 경제적 형편(가난함) 그리고 연보궤에 넣은 돈(두 렙돈=한 고드란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칠 수 있거나 무시해도 좋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행동(눈에 띄는 긴 옷; 시장에서의 문안; 회당에서의 상좌; 잔치의 상석)과는 판이하게 달리 행동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에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다가올 자신의 희생을 예시한다.


->자신의 말 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다. 성전을 이용하여 과부의 가산을 삼킨 사례가 과부의 헌금이거늘, 과부가 구제에 힘썼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돈이야 말로 율법학자들이 오남용 했을 돈이다.


우리는 이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강도의 굴혈`과 같은 성전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타락한 성전의 예배 가운데에서도 정결하고 헌신된 사람은 있다. 사사기의 시대에도, 아합의 시대에도, 그리고 암흑기의 포로 후기시대에서도 신실한 사람은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어두움을 한탄하기보다는 한 자루 촛불이 되어 어두움을 밝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없이 헌신하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사람 말이다.


->가난한 과부가 모델이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하는 해석은, 일단 내용에도 맞지 않으며 "우리도 교회에서 그만큼 많이 바치고 헌신합시다" 하는 투의 이야기다. 사기에 가깝다.


성전을 떠나시기 전에 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그것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한 것(43-44절)은 과히 이례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하고 보 잘 것 없이 보이는 이 가난한 과부의 놀라운(?) 행동 즉 그녀의 전적 헌신과 희생("자기 모든 소유"[o[lon to.n bi,on auvth/j=her whole life])을 주지시킴으로써 다가올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 실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 알리고자 하였다. 사실 `자신의 모든 삶`(생계)을 연보궤에 던진 이 여인의 헌신적 희생의 행동은, 어느 학자(Wright 1982)의 지적처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40절) 타락한 성전제도와 기득권자들의 희생물일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희생 역시도 역사의 지평 위에서는 성전의 기득권자들(종교지도자들)의 희생물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구원의 놀라운 행동이었다(10:45).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타락한 제도 속에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계 모두를 바쳐야 하는 것(자발적이라 할지라도)은 결코 합리적인 행동일 수가 없다. 불의한 제도의 희생물처럼 보인다. 이점은 예수의 수난("많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타락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의 예언에 대하여 베드로가 반응한 것(책망)과 동일하다(8:31-33).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이와 같은 죽음이 우리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예수는 이 계획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희생의 길을 가셨다. 여기서 독자의 귀에 메아리쳐 남아있는 것은 단락의 마지막에 언급된 [그녀의 마지막 남은 두 렙돈을 의미하는] "o[lon to.n bi,on auvth/j=her whole life"이란 표현이다.


->과부의 헌금을 예수의 희생과 일치시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중간에 Wright 라는 학자의 해석이 올바르다. (전문이 없고 출처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문맥상 정말 해석이 올바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 'Wright'가 N.T.Wright 라면 성공회 주교이자 복음주의권의 최고학자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것을 인정치 않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맨 마지막에 그리스어를 언급하는데 아무 의미 없이 원문을 언급하는 것은 개신교의 무식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행동을 한다. 그리스어를 아는체 하면서 언급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뭐냐면, ὅλον τὸν βίον αὐτῆς 를 언급한 것이다. 그중에 βίον의 원형 βίος를 'life' 로 해석하면서 그녀의 모든 삶을 바친 것 처럼 이야기를 썼는데 완벽한 사기다. βίος 는 첫째로 'life'의 뜻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두번째 뜻 'that by which life is sustained, resources, wealth' 삶을 지속할 자원이나 부 의 뜻으로 쓰였다. 모든 성서 그리스어 사전은 두번째의 뜻에 괄호치고 이 구절을 써 넣었다. 사전도 찾아보지 않은 이런 거짓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히브리어,그리스어 원문'을 언급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른채 쓰는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점을 봤을 땐 놀랍지도 않다. 성서해석학의 교수가 말이다.


끝으로 제자들을 불러 이 여인의 행동을 그들에게 주지한 것(43절)은 제자도의 특별한 교훈으로 취급되어져야 한다. 이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과는 달리 제자들은 어리석은 제도적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그를 배반(가룟 유다)하거나 부인(베드로)하거나 도주(다른 제자들)함으로써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다. 그러나 사실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제도적 희생물(부끄러움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복음을 위한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누구든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 가난한 과부는 불의한 제도 속에서도 자기의 생계 전부 곧 그녀의 모든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연보궤에 던졌다. 이것은 과부들의 가산까지도 삼키는 그 당시의 기득권자들(종교지도자들)의 행동과는 너무도 다른 행동이었다. 이점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예수님의 모습(막 10:45) 속에서도 나타났다. 


->역시 방금의 연장이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행동의 예시로 바로 다음줄에서 예시를 들어주고 있는데도, 다른 부분을 언급하면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 과부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동은 앞으로 다룰 향유 부은 여인의 모습(14:3-9)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의 헌신에서 바친 것들의 외관적 가치는 너무도 다르지만 - 하나는 보 잘 것 없는 두 렙돈이고 다른 하나는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부인`(self-denial)의 행동이었다(Malbon 1991:599. cf. 막 8:34). 특별히 마가복음에서 무명의 여인들의 모습들(혈류증 여인[5:24-34]이나 수로보니게 여인[7:24-34] 그리고 가난한 과부[12:41-44]와 향유 부은 여인[14:3-9])은 제자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담대한 믿음`에서부터 `예수님의 자기부인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자기부인과 희생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 당시에 천한 여인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헌신`은 정말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들의 제자도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10:31)는 말씀을 여실히 입증되었다. 


->과부를 보고 예수는 속에서부터 욕이 우러나왔을 사건임에도 '과부의 아름다운 헌신' 이라 쓰레기 해석을 해놓고는 엉뚱한 사건과 연결짓고 있으며 '고귀한 것'이라 평하고 있다.



심상법 교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이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학 교수이며, 더군다나 정교수이다. 또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성경해석학 서론' 등을 집필하고 예비 목회자인 신학생을 대상으로 '신약성경 해석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을 강의하고 책까지 출판하며 마가복음에 대한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평생을 해석에 목을 매는 사람이 해석 방식과 해석 능력이 X판이며 방법론 부터 X판이라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시사한다.


그 문제점은 곧 총신대학교 및 예장합동의 문제이다.


마가복음 12장의 주해 전문을 보고 싶다면,

심상법 교수의 개인홈페이지

http://www.ebible.or.kr./board/view.php?id=info4&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

를 방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