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8장 16~20절 후대 창작인가?

종교경전/신약성경 2014. 2. 18. 04:46

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8장 16~20절 후대 창작인가?


<모든 글은 직접 작성함>


이 구절에 대한 주석과 설교들은 대부분이 예수는 부활하여 종말의 때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결국 ‘선교 열심히 합시다’ 로 귀결된다.


본문(공동번역)


-1부

16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ㄱ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부

18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ㄱ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19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ㄱ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20ㄴ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1부

일단 16,17,18ㄱ 은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16절>마태오는 사도 중에 한명인데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지 않고 3인칭 보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의심하는 사람들’에 속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17절> ‘절하였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형 ‘προσκυνέω(프로스퀴네오)’는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15회, 마르코의 복음서 저자가 2회,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 저자가 7회, 요한의 복음서 저자가 7회 사용하는 단어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애용하는 단어이다. 엎드려 절한 상황도 가필했다.


<18절ㄱ>더군다나 '가까이 오셔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합성어 ‘προσέρχομαι(프로스에르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57회, 나머지가 37회 사용하는 단어로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가 즐겨 쓰는 단어이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καὶ προσελθὼν ὁ Ἰησοῦς + αὐτῶν, αὐτοῖς)’는 마태오의 복음서 17장 7절에서 변모 사건에도 있는데, 이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베낀 것이고, 루가의 복음서 저자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꼈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는 변모 사건을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끼면서 17장 7절(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를 가필했다. 즉,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문체다.


-2부

18ㄴ~20 은 마태오의 복음서가 만들어진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전승 및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18절ㄴ> 세 개의 절에 세 개의 ‘모든’ 이 등장한다. ‘모든’을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19절ㄱ> 선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사람으로 진화하였다. 이는 예수의 행적, 삶,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는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대하여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베끼면서 24절(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를 가필했다. 이것을 가필한 이유는 초대교회가 이스라엘에게 메시아인 예수를 믿게 하는 것에 대하여 한계가 왔기 때문에, 선교의 대상을 이방인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예수의 삶이 이스라엘에게만 이루어져 이방인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차마 그 이야기를 창작해 내진 못하고, 이방여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필하고 맨 마지막 부활이야기에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라는 것으로 창작 및 가필하여 정당화 하는 것이다.


<19절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루가 공동체 및 초대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고, 파울로스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 문서 디다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되어있으며 ‘주님의 기도’ 또한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그대로 베껴왔다. 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부분들 까지도 베껴온 것이 명백하다. 이 문서는 시리아 교회에서 있던 것이므로, 이 문서보다 살짝 앞선 연대의 마태오의 복음서는 분명 시리아 교회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는 원형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로 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창작이자 전승이다.


<20절ㄱ> <19절ㄱ>에 이어진다. 가르침은 산상설교를 필두로 하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20절ㄴ> ‘너희와 함께 있겠다(ἐγὼ μεθ ὑμῶν εἰμι)’는 LXX 하까이서 1장 13절의 후반부 ‘ἐγώ εἰμι μεθ ὑμῶν’를 베낀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생각하자면 1부는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 2부는 시리아 교회 공동체의 창작 및 마태오의 복음서 저자의 가필이다.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종교경전/본문비평 2013. 11. 10. 22:40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전투적무신론


차례

1. 들어가는 말

2. 본문비평 : 원본문 복원

3. 사해사본 : 해석과 주석

4. 주석자와 주석서의 권위

5. 한국어 번역판은 다 쓰레기

6. 결론



<들어가는 말>


나는 대한민국의 (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신학대학 교수들을 우습게 여긴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외국까지도 넓힐 수 있다.

나는 '어느 교수는 ~한 입장인데, ~한 해석을 하는데' 같은 쓰레기 주장을 제일 한심한 주장으로 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쓰레기 설교이자 한심한 주석을 내놓는 구절이 있다.


(마태복음 5:3)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새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개역개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난 이 구절에 대한 전국의 모든 쓰레기 주석, 설교, 강의를 다 까고자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부분으로,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워낙 찬송가에서도 많이 쓰는 표현이기에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참 낯설다.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표현은 1세기에서나 쓰였을 법한 말이고 지금은 2000년이 지났다. 마태복음 5:3을 제외하고는 이런표현을 볼 수가 없다.


이를 주먹구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개신교 개역성경은 영어 'spirit'을 심령(心靈)이라 번역하였는데, 심지어 어느 해석 중에는 개역성경이 진리이고 원문인 줄 알았는지 심(心)과 영(靈)이라는 글자를 분석한 해석도 있었다.


"돈 많아도 괜찮아요~예수님은 마음의 가난을 중요시 여겼어요~자발적인 가난이 중요합니다~돈 내세요" 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이 구절은 번역 자체가 쓰레기다! 공동번역, 새번역 조차도 쓰레기 번역이다.


나는 그리스어를 할줄 아는 흉내만 내는 놈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 '본문비평' 까지 해주겠다.




<본문비평 : 원본문 복원>



마태복음 5:13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복되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것이다. 하늘나라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원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평행구절이 있으니 누가복음 6:20이다.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ί ὅτι ὑμετέρα ἐστὶν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복되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는 분명 1번만 말했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원본문인가?

마태복음은 자신만의 어휘로 범벅되어있다. 우라노스와 바실레이아를 동시에 쓰면서 데우스와 바실레이아를 같이 쓰진 않는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는 데우스와 바실레이아를 같이 쓴다. 어려운가? 다른 성경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데 마태복음만 '하늘나라'라고 표현한다. 


누가는 제자들이 듣는 한편, 마태는 제자들과 군중이 듣는다. 그러면서 마태는 도덕교사가 말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탈바꿈 시켜 그런 도덕적인 사람들(그들, 아우톤)이 복되다고 표현한다.


더구나 프뉴마티(영)는 누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원본문은 누가이며, 마태는 개작했다. 자료비평으로 보면, 출처는 Q source.



<원본문>누가 6:20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ί

ὅτι ὑμετέρα ἐστὶν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호티 휘메테라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복되다!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개작>마태 5:3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복되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것이다

(하늘)나라가


[]는 아예 첨가한 것이고 ()는 수정한 것이다.


즉, 예수는 (진짜로)가난한 사람들이 미래에 올 하느님의 나라에서 복되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마음이 가난하다는 둥 하면서 도덕교사의 말로 탈바꿈 시켜 해석하려하는 건 쓰레기 짓이다. 애초에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애초에 없다. 이 구절에 대한 예수의 진의는 '없다'이다. 다른 사람이 조작한 말에 원작가의 의미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구절은 마태가 지어낸 것이므로, 1세기 내지는 비슷한 시기에 썼던 글에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동안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간 수많은 교부들과 유명한 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 주석가들이 주석을 달았지만 전부 쓰레기다. 그러다 20세기 중반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2군데에서 나옴으로써 해석에 대한 가능성이 열렸다. 그때부터 이 구절에 주석을 달 수 있게 되었다. 착각하지 마라.




<사해사본 : 해석과 주석>


아쉽게도 2개중 1개인 찬미가(호다욧)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앞뒤 문맥이 없다. 이건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전쟁 두루마리 14:7 는 한 구 정도가 구멍이고 나머지는 있다.


14:7 (...)Among the poor in spirit [...] a hard heart, and by those whose way is perfect shall all wicked nations come to an end;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로 인해 [...] 완고한 마음이, 그리고 온전한 길을 걷는 사람들로 인해 악한 국가들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는 반대의 뜻 , '온전한 길을 걷는 사람들' 과는 유사한 뜻 이다.


이와 거의 유사한 구절은


Ibid. 11:10 You will ignite the humble of spirit like a fiery torch of fire in a sheaf, consuming the wicked.


당신은 영의 겸손을 점화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곡식 단 속에서 불타는 횃불처럼 될 것이고, 악한 것은 소멸된다.

-> '곡식 단 속에서 불타는 횃불처럼' 이라는 표현은 Zechariah(즈카리야) 12:6 에서 따온 것이다.




<주석자와 주석서의 권위>


앞서 말했다 시피 주석자와 주석서의 권위는 없다. 고대 교부 누구가 주석을 썼든, 종교개혁가 누구가 주석을 썼든지간에, 그것은 BCE 1세기~CE 1세기 사이에 쓰인 쿰란문헌보다 권위 있을 수 없다. 예수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런 사람이라 칭하며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문맥으로 뜻을 밝혀낼 수 있고(그 당시에는 사전이 없다. 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많다.), 그마저도 쿰란문헌이 세상에 공개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누구는 주석하기를.." 이라며 구절에 대한 해석을 들이민다면, 그 사람이 1세기 유대인이 아닌이상 더 권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껏 비웃고 욕해도 좋다.




<한국어 번역판은 다 쓰레기>


해당 문장을 내가 직역했을 때 '복되다!' 하는 선언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문장은 예수가 익히 듣고 공부했었을 시편에 집중적으로 나오면서도 문장의 가장 첫번째 단어이다. 즉, 당시 민중이 시편을 들었을 때는 복되다는 선언이 먼저이고 내용이 나중이다. 예수는 그 문장을 본따서 선언하고 있으므로, 역시 복되다는 선언이 먼저이고 내용이 나중이다. 이는 예수의 아람어 말을 번역한 그리스어 신약본문에도 마찬가지로, 그리스어인 (μακάριοι 마카리오이)가 먼저 나오고 내용이 나온다. 시편은 히브리어인 (אשרי 아셰레-(이))가 먼저 나오고 내용이 나온다. 물론 내용도 '~한 사람'이 먼저 나오는게 이 문장의 특징이다.


최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부터 시작된 번역인 라틴어 불가타, 영어 KJV 들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판은 복되다는 선언이 문장의 맨 마지막에 위치해버려서, 민중이 직접 들었을 가슴 뛰는 문장을 도덕 교과서로 만들어버렸다!


번역 원칙이 어찌되었든, 이 부분은 문장을 깨어서 번역해야 한다.

가톨릭의 '성경'과, 개신교의 '두란노 우리말 성경'은 문장의 힘을 살려서 올바르게 번역하였다.


개역성경은 원래가 중국어 성경과 RV,ASV를 어설프게 번역한 것이니 원래 쓰레기니까 그렇다고 치고(그마저도 RV와 ASV에 대한 모욕이다), 공동번역은 당시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하나만 할 줄 알아도 대단한 실력자였기에 이정도는 그렇다고 친다해도, 훨씬 최근에 나온 개신교 표준새번역 과 그 개정판 등이 그 따위 번역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맨날 히브리어 그리스어 언급하면서 원문번역 해야한다고 한 번역이 표준새번역을 번역했는데, 서로 번역원칙이 하나도 안 맞는다. 시편번역만 봐도 얼마나 대충했는지 보여진다. 그러면서 제일 나은 그 원문번역본은 버리고 병신번역 개역으로 설교하고 논문쓰면서 원문 언급하고 있다. 하여간 정신이 나갔다.




<결론>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이것보다 올바르고 자세한 주석 및 논문이 있으면 가지고 와보기 바란다. 무신론자보다도 훨씬 못한 크리스천 신학자들의 수준을 보라. 칼동사니 완료니 남성형이니 복수형이니 외국 학자들이 문법번역 다 해놓은 것을 줄줄이 읽는 수준은, 동시대 히브리어 문헌들에 대해 읽을 줄도 모르며 알지도 못한다는 것은 그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과 해석은 박사학위 이상의 신학교수들도 헛소리 잘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목회학 석사의 목사들은 낄 자리 조차 없다. 사해사본 만한 또 다른 엄청난 발견으로 인해 새로운 내용으로 논문을 써서 논리와 근거로 반박하지 않는 이상 반박은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