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13장 18절, 짐승의 숫자)

종교경전/본문비평 2014. 1. 25. 13:27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13장 18절, 짐승의 숫자)


(1)666

666은 많은 그리스어 사본에 ἑξακόσιοι(헥사코시오이,600) ἑξήκοντα(헥시콘타,60) ἕξ(헥스,6)라 쓰여있고, 줄여서 쓸 경우엔 χξς(600,60,6)이라 쓰고 상단에 줄을 긋습니다.


지지사본은 코덱스 시나이티쿠스(א), 코덱스 알렉산드리아누스(A), 소문자사본 2377과 다수 본문들(비잔틴본문들), P 1006 1841 1854 2053(추정)


χξς(600,60,6) 라고 줄여쓰고 줄을 위에 그은 사본들은 A P47 051 M 과 2세기 교부 이레네우스, 3세기 교부 히폴리투스 입니다.



(2)616

한편, 신약성서 사본학에서 우수한 대문자사본인 에프라임 재생사본(C)은 ἑξήκοντα(헥시콘타,60) 대신에 δεκα(데카,10)라고 되어있습니다. 


ἑξακόσιοι(헥사코시오이,600) δεκα(데카,10) ἕξ(헥스,6). 그리고 616이라 적힌 많은 사본들을 알고 있던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의 증언이 뒷받침 됩니다. 또 라틴 교부이자 요한의 묵시록을 해석한 타이코니우스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χῖς(600,10,6) 라고 줄여쓰고 줄을 위에 그은 사본은 파피루스 115입니다.



(3)665

또 한편, 11세기 소문자사본 2344는 ἕξ(헥스,6) 대신에 πεντε(판테,5)라고 되어있습니다. 

ἑξακόσιοι(헥사코시오이,600) ἑξήκοντα(헥시콘타,60) πεντε(판테,5)


두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데, 666이 네로황제 임은 알겠으나, 배우기 어려운 시대의 한계상 히브리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발음이 NRHN QSR가 아닐까 하고 게마트리아를 해보니, 665가 나오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또는 그 지역에서는 네로 황제를 NRHN QSR라고 칭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래 로마의 공용어는 2개(그리스어, 라틴어)이고, 2가지 방식으로 읽혔기 때문에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원본문 추정시 요한의 묵시록이 그리스어로 쓰였기 때문에 666이 원래 본문일 것으로 추정하나, 1세기 말에 쓰인 요한의 묵시록이 2세기 필사본과 번역본 부터 라틴어 지역에선 잘못 쓰였다며 616으로 고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נרהן קסר, נרו קסר, נרון קסר 의 차이이지요. 네로 카이사르와 네론 카이사르. 히브리어 '눈 nun(N)'이 있고 없고는 라틴어->히브리어 변환과, 그리스어->히브리어 변환에 'N' 이 1개 차이나기 때문에 'N'에 해당하는 '50'이 있고 없고에 따라 616에서 616+50=666 이 됩니다. 맨 마지막의 것은 네론(ㅎ발음을 넣어서) 카이사르라고 적은 것을 게마트리아 한 결과 665가 됩니다. 그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 로마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נרון קסר> NRWN QSR

200,60,100,50,6,200,50

합 666


<נרו קסר> NRW[N] QSR

200,60,100,[히브리어 Nun 생략-값 50],6,200,50

합 616


<נרהן קסר> NR(H)N QSR

200,60,100,50,(히브리어 Vau 대신 He-값 5),200,50

합 665



즉, 그리스어 사본의 숫자는 666,616,665 3가지나 됩니다. 더구나, 최소 2가지(666,616)를 만족시키는 것은 '네로 황제' 밖에 없거니와, 최대 3가지(666,616,665)를 만족시키는 것도 역시 '네로 황제' 뿐이므로 이외의 성서주석은 주석자의 권위를 막론하고 '쓰레기'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수의 계시가 아닌 이유와 대안

종교경전/고등비평 2013. 5. 1. 04:15

<요한계시록이 예수의 계시가 아닌 이유와 대안>

1)요한계시록에 예수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1:8,21:6,22:13)

알파와 오메가란 그리스어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말하는데, 그 뒷 구절에 설명되었듯,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다. 예수는 아람어 사용자이며, 그리스어를 설령 알았다고 한들 계시를 그리스어로 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시를 받는 사람이 사도 요한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2)요한계시록의 저자를 흔히 사도 요한이라 이야기 한다
이는 1:1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이다. 1:1에는 '종 요한'이라고 했지 자신이 사도라는 단어조차 없다.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썼다고 치더라도, 그는 100세 가까이 살았다는 이야기 인데, 이는 신빙성이 없다. 조선시대 왕이나 산해진미 먹어도 평균 46세 면 죽었는데 그보다 1300~1800년 앞선 요한이 100세 까지 살았다? 고려시대에도 왕의 평균 수명이 42세.
요한보다 200년 전 사람인 중국의 진 시황제도 안 죽으려고 발악을 했는데 49세에 죽었다. 예수와 사도 요한이 살았던 시대 ±100년 정도의 로마 '황제'가 암살을 빼고 최장수해봤자 70대.

즉,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지은 것이 아니라 어느 '요한'이 지은 것이며, 요한이란 이름은 철수와 영희같은 이름이다. 신약성경에 세례자 요한, 요한 마가(마가복음의 저자라고 불린 사람), 사도 요한,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만 해도 4명이며, 야고보도 4명이다. (번외 이야기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원래는 여호수아,예수아,예슈아 이며 구약성경에 널렸다.)

사도 요한이 AD 100년 정도까지 살았다는 전설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한 교부는, 소문이나 몇 번 건너 듣는 이야기를 엄청 적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사실은 알고 제시하는 것인가? 더구나 요한은 흔한 이름이었으므로(당시에는 성이 없었기에 이름이 다 똑같았다) 헷갈렸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

설령 사도 요한이라 치자. 사도 요한은 시골촌뜨기 어부였으며 아람어 사용자였다. 예수가 사도 요한에게 들려준 말은 아람어 였을 것이지 그리스어로 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요한이든 베드로든 예수든 촌놈들이라고 불렸다(복음서의 내용).

3)계시록의 언어 문제
계시록에서 요한이 말하는 부분과, 예수가 말하는 부분이 아람어라면, 24장로가 야훼에게 말하는 말은 어떤 언어이며, 천사가 외치는 말은 어떤 언어인가?

환상속에서 예수가 요한에게 직접 다 적으라면서, 심지어 요한은 계시록 맨 마지막에 여기서 단어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필사자에게 협박까지 하는데,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으므로 모두 그리스어로 말했을 것이다. 예수가 아람어로 말했는데 요한이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적었다면 일단 1차 왜곡이 있었으므로 계시에 오류가 생긴다. 그러므로 모두 그리스어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상 모순이다.

24장로는 원래 없는 존재이고 천사는 (예수시대-신약성경-에는 아람어, 그 전 시대-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를 썼을 것이며-사실 천사의 언어가 변한 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까지 그리스어를 쓸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당시 여자는 물건 취급 당했으며, 글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아마도 아람어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는 아람어로 이야기 해야지만 마리아에게 잉태를 전할 수 있었다. 한편 그 잉태 이야기를 쓴 누가복음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마태복음에서 요셉에게 말한 천사 역시 아람어로 말했을 것이며, 요셉은 목수(일용직 막노동꾼)였으므로 자기네 말도 잘 몰랐을 것이다. 역시 그 이야기를 쓴 마태복음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에서 천사가 성경의 인물들에게 말하는 구절 역시 전부 히브리어로 적혔으므로, 히브리어로 말했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언어는 변할 수도 있지.."라는 주장은 요한계시록이 작성된 이후의 모든 계시는 -예수의 계시니 마리아의 계시니 자신들의 언어로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을- 전부 계시로 인정해야 한다. 그건 정경이 아니지 않냐 할지 모르는데, 예수가 AD 100년 경에만 계시를 한번 주고 약 300년 지나 정경 확정된 이후 계시를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의 뜻을 인간이 어찌 안다고 계시를 부정하나?

AD 100~400년 사이의 계시는 다 가짜이며, 그 이후의 계시도 다 가짜라면 요한계시록도 가짜라고 주장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 아닌가?

4)예수는 영으로 요한과 말하고 있다
예수는 영으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부활 후 사도들에게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다. '육신의 부활',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예수교는 무너진다. (그래서 신약성경 거의 모든 권이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더구나 예수 자신이 영으로 오겠다고 한 적이 없다. 부활 후 영으로 부활한다는 이야기도 한적이 없다. 사두개인들과의 부활여부 논쟁(공관복음서 모두)에 있어서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표현은 천사 처럼 영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천사 처럼 성욕도 없어서 자식을 키울 부부관계는 필요없으며, 다시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천사처럼 질병과 고통 또한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다.

"사도 바울이 영으로 된 예수를 보지 않았는가?"라고 주장할 지 모르나, 그것은 사도행전 딱 1군데 에서만 나타나는 기록일 뿐이며,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쓴 편지에서 예수를 어떤 에피소드로 어떠하게 만났다는 단어 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개신교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직접적인 저자로 인정받고 혼자서 여러권을 쓴데다, 철저한 검증에서도 7권이나 살아남은 사도 바울이 나는 예수를 이러이러하게 봤다고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을 제일 빨리 잡은 연도가 바울편지(AD 50년대 초반)보다 최소 30~40년 후의 작품이다. 즉, 본인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다른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꼴.

예수의 육신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교는 존재 이유가 없으므로, 서양에서는 '예수는 정말로 죽고 부활하였는가?' 라는 주제로 1:1 맞짱토론이 심심찮게 벌어지며 무신론이고 이슬람교고 물불 가리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 예수교 철학자이자 변증론자 윌리엄 크레이그는 이 주제 하나만 가지고 여러번 토론해대고 부활이 진짜라고 주장했다. 그 크레이그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와 토론을 못해 안달병이 났을 정도로 부활에 목숨 걸고 있다. 왜? 부활이 거짓이면 예수교는 가짜니까. 그래서 변증론자들은 이슬람교와도 토론에 나선다. 이슬람교는 예수가 직접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고 믿지 않으니까. 예수는 알라가 천국으로 보내주고 예수 인것처럼 감쪽같이 속인 배신자 유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하니까.

5)요한계시록이 비정경이라고 비판받은 적이 있다.
무신론자들의 비판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부터 정통이라 불리는 집단에서조차 이것은 예수의 계시가 아니라며 정경이 아니라 했을 뿐더러, 정경을 확정지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까지도 이것은 정경이 아니라며 치고박고 싸웠다.

결국 당시 교회(지금의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밀고나가서 정경이 되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시 부정되었다.

정작 요한계시록을 정경이라고 밀어붙인 원조 집단은 계시로 보지 않고 묵시문학작품으로 보는 반면, 원조의 이단격인 개신교가(대부분 근본주의) 진짜 계시라며 일일이 구절과 단어를 쓰인 이후의 사건들에 맞추어 해석하려 들고 있다.

정통이 된 집단이 이단 정죄한 소위 '초대 교회 이단들' 또한 요한계시록은 정경 축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번외 이야기지만, 사도의 저작이라 주장되었던 베드로,야고보,히브리 서신 등은 물론이고 바울 목회서신(디모데전서,후서,디도서)도 정경에 끼워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이단들'의 주장은 1800년 후 적중하여 바울 목회서신은 물론 베드로 서신도 의심할 바 없는 차명서신으로 분류된다.

6)요한계시록이 정경이 되었다면, 베드로계시록도 정경이 되었어야 한다

계시록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베드로계시록도 만만치 않은 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에 비해 분량은 작지만 그리 작성연대가 차이나지도 않을 뿐더러 초대 교회는 이것도 사도가 쓴 계시록으로 읽었다. 베드로계시록도 예수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두 계시록은 둘 다 정경이라고 주장되거나, 둘 다 비정경이라고 주장되었지, 어느 한 쪽 만이 정경이라 하지 않았다.

7)예수는 열매를 강조했다.(공관복음서 모두)
예수와 바울 역시 종말론자였다. 하지만 예수의 종말론과 바울의 종말론으로 나쁜 열매를 맺은 것에 비해, 특히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열매가 좋지 못하다. 요한계시록 만큼은 쓰인 직후부터 종교 사기가 1900년 동안 벌어졌다. 요한계시록으로 종말이 언제라고 주장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 종말론으로 사람들의 모든 재산과 인생을 헌납하게 한 사례는 셀 수 없다. 이는 나쁜 열매이다. 분명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예수와 바울의 종말론인데, 듣도 보도 못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이 더 진짜인 양 행세를 하고 있으며 이는 거짓이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빠진 26권이 신약성경이었다면 예수와 바울의 종말론에 의해 '언젠간 오겠지, 내가 죽기 전에 오겠지' 정도의 무한한 기다림만 있었을 것이지, 언제 무슨 일이 있고를 정확하게 찝어내진 못했을 것이다.

8)예수의 말이 복음서와 달라졌다(1)-예수는 자신이 계시를 나중에 준다는 얘기를 한적이 없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라 하면서 나올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이 설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인자가 올때에 이러이러 할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갑작스러운 재림을 주장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예수 사후 최소 60년 후에 등장하면서 은밀하게 섬에서 유배받고 있던 요한 한명에게 슬쩍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뜻인가? 복음서보다 계시록이 우선인가? 복음서는 육체를 가진 예수가 땅에서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계시록은 환상 속에서 영인 예수가 한명에게 이야기 하고 보여주고 있다. 다시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9)예수의 말이 복음서와 달라졌다(2)
2:20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는데 이것은 죄라고 표현된다. 이는 예수의 뜻과도, 바울의 뜻과도 어긋나는 가르침이다. 예수도 바울도 음식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이 구절은 비유니 어쩌니 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왜냐하면 근처의 말은 과거의 사람에 빗댄 비유이지만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이사벨로 비유한 이유는, 이사벨이 이스라엘에게 섬기게한 이방신 바알과 대결해 승리한 전설적인 예언자, 신약성경에서도 두 명(세례자 요한,예수)이나 그 사람이라고 칭함 받은 사람, 불수레 타고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예언자의 대표 엘리야다.

그런 이사벨 같은놈이 지금 두아디라 교회에 있는데,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신자들과 같이 먹고 있으니 그 제물 같이 먹는 사람 가만 안둔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예배에 먹지? 하는 생각을 가지겠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 자체가 그냥 식사에 가까웠다. 빵과 포도주를 메인으로 한. 가톨릭에서 매주 하는 조그만 면병 주는게 성만찬이 아니었다. 개신교에서 몇달에 한번 하는 떡이나 빵 조각에 포도즙(주?) 한 스푼에 가까운 양의 컵으로 하는 성찬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다 같이 식탁 차려놓고 빵 쌓아두고, 포도주를 박스채로 갖다 놓고 예수의 몸과 피를 생각하며 먹고 마신거였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못 먹은 사람을 위해 좀 기다리면서 배고프면 식사 미리 하고 오라는 둥 이야기 하고 있다.

10)예수의 말이 복음서와 달라졌다(3)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고, 이웃은 물론이고 원수도 사랑하면서, 사도 요한이 벌을 주자고 제안했을 때 사도를 꾸짖은 예수가 계시록에 와서는 교회에 심판을 내려 죽이겠다고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변한다. 요한계시록이 '예수가 사도 요한에게 준 계시'라면서 사도 요한에게 육체로 있을 떄와 영으로 보여줬을 때의 말이 다르다? 이는 사도 요한이 쓰지 않았다는 증거 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이 정경된 이유는 '사도'의 글이라는 것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그것이 정경의 기준이니까), 사도의 글이 아니거나 사칭한 것이라면 정경목록에서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어떠한 대안이 있는가?>

1)진짜 계시가 아닌 묵시문학적 작품으로 바라 본다면 문제는 일단락 지어진다.
이미 AD 397년에 정경 된 상황에 현대 신학에 맞추어 비정경으로 요한계시록 1권이라도 들어냈다간 나머지 26권 중에서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 들어내야 한다.

묵시문학적 작품이라면 그것이 사도 요한이 썼네 안썼네, 실제 일이 벌어지네 아니네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지고, 당시의 상황, 즉 '그 만큼 힘든 이 시기에 지금의 박해를 참고 견디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는 주제만 남게 되므로 그리스도교는 유지될 수 있다.

2)묵시문학적 작품으로 바라보아 요한계시록이 진짜 종말묘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종말론에는 변함이 없다
설령 또 다른 종교 개혁이 일어나 요한계시록을 들어낸다 하더라도 예수와 바울의 종말론에는 변함 없으며, 교회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 종교 개혁 당시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들어내려고 시도 했던 것이다.

루터회의 창시자, 종교개혁자의 대표 마르틴 루터는 "사도의 것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지킬 것도 없고, 무슨 말 하려는지도 모르겠고.." 라는 평을 했다. 루터의 생각은 현대신학에 들어 적중했다.

3)묵시문학적 작품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유대교에서는 이미 1900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니엘서를 예언서에 분류해 놓고 예언인 양 끼워 맞추려는 노력을 했으나(주로 근본주의 개신교), AD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되고 지금까지도 다니엘서는 '성문서', 잠언이나 시편 같은 문학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유대교가 무너졌는가? 지금까지도 유대교는 살아남았다.

구약경전의 소유자인 유대교에서 조차 다니엘서가 예언이 아니며 문학작품이고, BC 500년대에 지어진게 아니며 BC 10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 이야기하는데,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진짜 다니엘이 BC 500년 대에 지은 것이며 예언서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계시가 아님을 10가지로 증명했고, 그 대안으로 묵시문학적 작품으로 바라보아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3가지로 보였다.
이는 본인 전투적무신론의 생각이지 어느 책에 나온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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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오류 - 수정/첨가/삭제가 이루어진 구절

종교경전/본문비평 2013. 4. 24. 03:13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공동번역)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버리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책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는 글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누군가가 더한 구절이 있다.


요한계시록 16장 14~16절(공동번역)
14절 : 그것들은 악마들의 영으로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을 위해서 온 세계의 왕들을 모으려고 나간 자들입니다.
15절 : 그 때에 "잘 들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6절 : 그 세 악령은 히브리 말로 하르마게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14절과 16절은 연결되는 부분이고 15절은 전혀 엉뚱한 내용이다. 15절을 삭제하고 읽으면 더욱 문맥에 맞는다.

요한계시록이 무오하며 정말 예수의 계시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고한다.

'이미 요한계시록은 수정/첨가/삭제가 이루어졌으며, 예수의 계시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