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교수의 'Q문서 평가'를 반박함

종교경전/고등비평 2013. 9. 19. 01:06

조병수 교수가 직접 쓴 'Q문서 평가'를 반박함. 

'->'와 '굵은 글씨'는 전투적무신론의 글 및 강조이며, 작은 글씨(8pt)는 조병수 교수의 글이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직접 올린 글로 교수의 프로필 부터 시작한다.


조병수 목사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Westfaelische Wilhelms-Universitaet) 신학부 신학박사 (Dr. theol.) 신약학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1988-1990)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1991-1994)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직접 확인해본 결과 현재 예장합신 신학대학원의 신약학 교수이고, 현재 예장합신 신대원 총장이다.


Q문서 평가 (2008.7.6. 합동소식)


최근에 소위 Q문서를 기초로 하여 기독교를 다시 정의하자는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 이때 Q문서의 허와 실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Q란 무엇인가? Q는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Quelle)의 약자이다. Q의 내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공통적으로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는 들어있지 않는 본문들이다. 예를 들면, 겨자씨 같은 믿음에 관한 말씀이다(마 17:20/눅 17:5f.). 복음서들을 언급할 때 사선 / 또는 이중사선 //은 병행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로 이루어진 어록 수집이라고 한다. Q란 표현은 지난 19세기에 공관복음서 연구에서 두 자료 설이 주장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관복음서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종합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서 같은 조망을 가지고 기록된 복음서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두 자료 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과 또 어떤 자료(소위 Q)를 사용해서 기록했다고 추정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마가복음과 어떤 자료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자에게만 독특한 내용들이 있다. 따라서 두 자료 설은 필연적으로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 우선설에 근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의존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자료(소위 Q)를 가정하는 Q자료 설에 근거한다.


Q자료 설은 20세기 초엽부터 양식사라고 불리는 성경연구방식이 활개를 치면서 공관복음서연구 분야를 삽시간에 장악했다. 물론 이에 대하여 거센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신약학자들이 Q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Q자료라고 부르던 것이 Q전승 또는 Q문서라는 표현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아예 Q복음이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고, Q공동체라든가 Q신학이라는 용어들도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국제적인 Q 프로젝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Q문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서론으로 Q문서에 관해 압축하여 배경지식으로 제시한 부분으로, 내용은 어느 정도 맞다. 중간중간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리고 Q는 1800년대 초반에 등장한 것으로 20세기가 아닌 '19세기'다. 더구나 양식비평이 아니고 '자료비평'이다. 



이렇게 역사가 흐르면서 소위 Q문서와 관련하여 가설이 정설로 변했다. 우스운 말이지만 가설도 자꾸 연구하다보면 정설이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학문의 오류일 수도 있다.


->여기부터 헛소리가 시작된다. 수많은 가설들이 연구되다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설명할 수 있을 때 정설이라 표현되고 증거들이 뒷받침 된다면 이론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설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한다. 사전을 1회라도 찾아봤을까?



그러면 Q문서 이론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을까? 놀랍게도 Q문서를 주제로 삼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이에 대한 문제점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를 감춘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닐 성 싶다. 학자들이 구태여 숨겨두고 싶어 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들추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Q문서와 관련된 역사적인 문제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역사상에 Q문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에 Q문서가 존재했다면 두 가지 현상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이런 어록 수집을 전승하는 사본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본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다른 복음서들을 언급하는 것처럼 이런 어록 수집을 언급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언급 역시 전무하다. 사본의 부재와 교부들의 침묵은 Q문서란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Q자료 설을 지지하는 어떤 학자의 솔직한 고백을 따르자면, Q란 단지 학자들의 합의(a scholarly convention)에 지나지 않는다.


->‘교부들의 언급이 없고, 사본이 없으므로 없었다’ 는 주장은 Q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나타낸다. Q 공동체는 갈릴래아 촌동네에서 유대-그리스도인 들이 만든 것으로 압도적 증거들로 추정되고 있다. 그곳에 교부언급이니 사본필사니 하는 주장은 그저 헛소리다. 그런 언급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 제국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것을 필사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10%가 채 안되지만, 그마저도 모였다는 도시에서 진행된 일이다. 그러나 Q공동체는 속국의 촌동네로 자기네 사용어인 아람어도 겨우 말하던 곳이다. 그 공동체는 묻혔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자가 교수고 신학대학원의 총장이니까, 저자 스스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 했기에 본인(전투적무신론)이 이렇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이지, 어디 아프리카 시골에 5명 출석하는 교회 목사가 입으로 주장했다면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더구나 Q문서의 시대는 2세기부터 시작된 교부시대가 아니라 1세기 사도시대 이다. Q문서는 최소 50~6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도들이 다 살아있을 시점이다. 교부의 언급은 당연히 없다. 왜냐? 사도시대니까. ‘강력한 증거’ ‘학자’ 운운 하면서 무슨 시대인지도 판단을 못하고 있다.



둘째로 Q문서와 관련된 내용적인 문제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고 있는 어록집이다. 사실상 학자들은 Q문서에 세례자 요한의 말도 일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마 3:7-12/눅 3:7-9,16-17). 따라서 Q문서에는 치병이나 이적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언급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록만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을 중요한 예로 제시한다. Q문서는 도마복음을 닮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간단히 말해서 시대착오적이며 탈선적이다. 왜냐하면 도마복음은 후기문서인데다가 초대교회에 의하여 이단시된 문서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빼먹은 채 어록만으로 복음서를 작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후에 이단들이나 하는 행위였다.


->Q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린 헛소리다. Q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부분은 분명 들어있다고 추정한다. 이는 독일어 Quelle ‘원천, 근원’ 이라 부르고 그것이 복음서에서 분리해낸 것이기에 대부분이 예수의 어록이니까 우리는 그냥 ‘예수 어록’ 이라 부르는 것을 교수는 심히 착각하고 있다. ‘Q=예수어록’ 이 아니고, ‘Q≒예수어록’ 이다. 허나 이 교수는 ‘어록이 아닌 부분이 나왔으니 거짓’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본인이 제안하건대 ‘정경복음서 이전의 예수연관문서’ 라는 표현으로 Q를 대신한다면 아마 입도 뻥긋 못할 것이다. 이 교수는 Q가 무슨 뜻인지 서론에 직접 제시해 놓고, Q는 어록이라고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이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단어의 뜻을 잘못 외웠던지, 둘째는 서론을 베껴왔던지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나는 후자에 걸겠다.


더구나, Q에는 예수의 기적이 2개나 나온다. 구체적으로 '로마 백인대장의 종을 말만으로 고친 기적이야기'와, '귀신을 내쫒은 것을 보고 예수를 바알세불과 한편으로 몰아간 기적이야기'로 2개씩이나 나오는데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헛소리다. Q를 1회도 정독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뭔지도 모르면서 없다고 주장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도마복음을 중요한 예로 제시하는 것은 맞지만, 후기문서니 이단문서니 언급은 그냥 웃길 뿐이다. 초대교회에 ‘정통’은 없다. 문자주의도 영지주의도, 마르키온파도 에비온파도, 그 누구도 정통도 이단도 아니었으며, 최초의 정경목록을 짠 사람은 원-정통 기독교(proto-orthodox christianity)가 후대에 주류집단이 되어 이단으로 정죄한 마르키온파이다.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마르키온의 정경목록을 늘려서 신약성경 만들어 놓고는 현대에 들어서 마르키온의 판단이 더 정확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는 시점에 그냥 헛소리다. 마르키온은 누가복음+바울서신으로 정경을 짰고, 바울 목회서신 3개와 공동서신은 물론이고 계시록과 다른 복음서 까지도 비정경이라 주장한 인물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하여 현대신학에서 목회서신은 물론 공동서신 까지도 의심할 바 없는 차명서신으로 분류된다. (마르키온이 목회서신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목회서신이 만들어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게 여겨지기도 한다. 2세기의 인물이 목회서신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 쓰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나저러나 위경이다.) 


도마복음의 최초 원본은 1세기 중반~2세기 초 쯤에 생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며(교부들의 언급을 포함한 최종 결론), 지금 남아있는 사본은 2~3세기의 것이다. 몇몇 보수주의 학자들이 2세기 후반이라는 둥 헛소리를 떨지만, 지금 남아있는 사본이 원본이라고 백번 양보해 가정해도 2세기 중반을 못넘어간다. 어쨌든 그때까지도 이 문서는 살아남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로 이단이었기에 작성조차 허용하지 않고 탄압했다는 주장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더구나 정경인 베드로후서보다 앞선 시대거나 동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주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로마에서 종교로 인정받고 후에 국교로 인정되자 정통이 된 주류가 이단이라 명명한 집단을 일방적으로 탄압하고 그들의 문서를 불태운 사례는 있다.



게다가 Q문서의 내용적인 문제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수난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빠진 것은 물론이고 수난을 예고하는 말씀도 없다. 최근에 이런 점에 착상하여 기독교를 수난 없는 기독교로 다시 정의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의 복음규칙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하지 않는 Q문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없고, 이에 근거하여 수난 없는 기독교를 제시하겠다는 시도는 역사상의 어떤 이단보다도 못한 시도이다. 심지어 아주 치명적인 이단들 가운데 수난을 재해석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수난을 생략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의 수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니며 정통이 아니라는 주장은, 근본주의 변증론을 맛만 본 변론이다. 재정의니, 복음규칙이니, 이단이니 하는 소리로 보아 반박 가치 없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쓰자면, Q문서에 수난이 없는 이유는 50년대에 지어 졌다고 여겨지는 이 문서의 공동체가 ‘목격자들과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니까. 수난 내용은 예수가 살던 갈릴래아의 40~50년대에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쓸 필요가 없지만, 예수의 행적과 말은 한 세대가 지나 없어져 가고 있으니까. '갈릴래아 촌동네의 (예수를 직접 경험했거나 들은) 사람들이 모였던 50년대의 유대교 나자렛 메시아파' 가 이 공동체다. 



Q문서의 내용적인 문제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학자들이 정리해놓은 Q문서의 구절목록이 그 존재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Q문서에는 묶음으로 나타나는 구절들도 있지만, 한 두 절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구절도 있다. 예를 들면 마 15:14/눅 6:39, 마 13:16f./눅 10:23f., 마 17:20/눅 17:5f., 마 19:28/눅 22:28-30 같은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담이나 격언처럼 너무나 유명한 단문들이기 때문에 이런 정도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암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얼른 알아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신 순간부터 사람들이 바로 암송하여 구전으로 널리 회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들이 반드시 Q문서와 같은 어떤 문서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유명한 짧은 구절에 기초가 되는 Q문서가 있었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구전이 뭔지, 속담이 뭔지, 격언이 뭔지에 대한 단어 정의도 모르는 듯 보이며, 전승과정은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을 단 1회도 해보지 않은 말이다. 즉 아무 의미가 없는 허공에 짖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구절들을 일일이 살펴본 결과 내 생각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는 우리속담 마저도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역질문 할 수 있는 부분은 "단문은 Q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묶음은 Q라고 주장 하는거요, 아닌거요?" 이다.



이와 더불어 Q문서의 문제점에 부수적인 것을 한 가지 첨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소위 Q문서를 재구성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어려움은 두 복음서에 공통적인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생각처럼 자구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Q문서를 사용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왜 차이가 생겼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쓴다. Q문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저자의 정신승리가 돋보인다. ‘아니라 말하면 될 것을’ 은 ‘믿음이라 말하면 될 것을’ 하는 투의 말이다. 전형적인 개신교(혹자는 개독이라 부르는)스러운 답이다. '그냥 아니라 부인하면 돼'. 그럼 내가 이 교수에게 역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Q가 아닌, 또 다른 '공관복음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시오" 이다. 아마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된다. 예상 답변은 '믿음' 이 아닐까?



정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학자들이 재구성한 Q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속적인 흐름(a continuous narrative)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 현상을 바꾸어 말하자면 Q문서의 기록자는 아무런 논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집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과연 초대교회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누가 감히 그런 일을 시도했을까, 그런 시도가 초대교회에서 용인되었을까, 그런 시도에서 나온 문서를 과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 기꺼이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허망한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복원한 Q문서를 단 ‘1회’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논리도 없고, 뭐가 들어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있었다고 하는게 초대교회에서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하는 말은 교수인 저자가 스스로 ‘나는 모르오’ 하고 말하는 꼴이다.



*전투적무신론의 총평 : Q문서에 대해 언급하고 반박하려 하지만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알맹이 없는 주장이다. Q문서를 단 ‘1회’도 정독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실천신학 따위의 허접한 학문으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신약학으로 독일까지 가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비 목사들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이가 없다. 독일에서 나온 Q문서설(Quelle 는 독일어다)을 독일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인가?


원본글 : http://gensdei.org/zboard/view.php?id=poe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5

이 글을 2600명 이상이 읽었으며, 다른 홈페이지에서도 복사해가고, 소식지에 실렸었다는 것도 정말 어이가 없다.